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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회大聖會(18)
길은 몇개인가?
 
박선협大기자
▲     © 매스타임즈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적인 점이 잘 나타나는 항목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이론적 표상의 주제 가운데 궁극적인 존재, 원리 또는 경지에 관해서, 불교는 잘 알려졌다시피 신을 그 자리에 놓지 않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등을 다분히 신으로 관념하고 숭배하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령의 불교 교의에 입각한 신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붓다, 보살이 아니더라도, 불교에도 신중(神衆)이 있고 그들을 신앙하는 행위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런 신들은 다 중생에 속한다. 궁극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궁극적인 진상으로서 연기법(緣起法)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 이른바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에 상응하는 불교의 궁극적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연기법은인격적 신이 그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섭리와는 달리 어느 누가 만든 것도, 시작된 때도 없어질 때도 없는 세상의 본래 진상을 가리킨다. 전자를 '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 하고 후자는 '비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그 연기법을 깨달은 이가 궁극적 존재이고 그 깨달음의 세계가 궁극적인 경지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궁극적 존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세상의 진상을 깨달으면 궁극적인 존재이다. 심지어, 누구나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다고 하는 본각(本覺) 사상에 의하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궁극적인 존재이다. 불교가 유신론적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의 이론적인 면 가운데 우주론과 인간론을 보자면, 불교에는 창조신화가 없다. 이 세상과 인간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또 언제 어떻게 해서 멸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설명할 것도 관심을 둘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 문제를 무기(無記)라고 일컫는다. 그런 의문은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 등 세상의 진상을 모르는 어리석음[痴]과,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일으키는 성냄[瞋] 및 탐냄[貪] 등 중생의 질병을 고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 그런 쓸 데 없는 문제에 매달리다가 정작 급한 병 고치기에 관심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우주론을 대표하는 개념이 법계(法界)이다. 여기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연기(緣起)이다. 삼라만상이 각자 개별자이면서도 동시에 연기적인 존재로서 한덩어리로 얽혀 있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일자(一者)에서 나왔고 그리로 귀결된다는 교의는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지만, 불교에서처럼 무수한 개별자가 각자 개체인 동시에 그 개체성을 무화시키지 않는 채 모두 하나라는 극단적인 역설을 이야기하는 예는 찾기 힘들다.

불교 인간론의 특징은 앞에서도 시사했듯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인간에서 비롯되고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하는 데 있다. 인간 밖의 어떤 존재나 힘이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강력한 존재가 주는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믿는 면도 있다. 그러나 교의만을 가지고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들도 신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은 순전히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달린 은총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인과응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여느 주요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그 긴 역사 동안 장엄한 제의(祭儀)형식들을 다양하게 구축해 왔다. 붓다를 예배하는 예불의식, 설법이 중심이 되는 법회가 있는가 하면 천도제(薦度祭)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제의가 개발되었고, 경전의 음송(音誦)과 음악, 춤, 서화, 조각, 건축 등 모든 예술적 매체를 종교행위에 활용한다. 우리 나라 문화재의 절대적인 부분이 불교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불교가 한국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리고, 불교의 제의는 불교가 정착하는 곳에 따라 그 지역의 문화와 풍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모양을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물론 어느 종교의 제의나 지역에 따라 다소간 그 지역의 색깔을 입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 종교들과 견주어 보면, 불교의 제의에서는 다른 어떤 종교의 경우보다 지역적 특색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종교집단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출가 수행자 집단을 들 수 있다. 물론 가톨릭의 경우도 출가 수행자들의 집단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 외의 세계 종교들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가톨릭과도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출가자 사이에서도 사제와 수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출가자는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3. 가피(加被), 깨달음, 제도(濟度)

종교적 신념의 유형을 기복(祈福), 구도(求道), 개벽(開闢)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다. 복을 받고 화는 피하는 것을 종교적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위주로 해서 신행을 전개하는 것이 기복형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의 의지에 따라 화복이 나뉜다는 관념이 바탕이 된다. 한편, 세상과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와 그것을 체득하는 경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 수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구도형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리고, 개인 단위로써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혁명적인 변화를 전망하면서 이에 대비하거나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개벽형이다. 세상 전체가 바뀌어 일거에 종교적 이상이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어느 종교에나 이 3가지 요소는 다 있다. 교리의 차원에서는 뚜렷이 어느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거나 별로 강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행의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종교든 그 3가지 주제를 모두 다소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3가지를 다 다룬다 해도, 종교에 따라서 3가지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을 위한 노력이 구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고, 사회 현실을 개조하여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이 개벽에의 기대와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심이 결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내리는 은총으로 수렴된다. 개념은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지만, 위의 3가지 범주 가운데에서는 기복형에 해당한다.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맡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불교는 흔히 구도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역시 구도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념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구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한 자기 극복이다. 불교에서 인간의 병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세상과 자기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한 각종의 그릇된 행태이다. 그러므로 치료 방법은 곧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다. 물론 밖으로부터의 영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주변적인 것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이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처럼 극기가 중심 주제인 만큼 구도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도 고행 극기가 대종을 이룬다. 출가 수행생활 자체가 고행의 총화이다. 엄청나게 많고 엄격한 계율의 항목들, 특히 비폭력, 청빈, 금욕의 계율들이 모두 구체적인 고행의 처방들이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극복하는 데에 유일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것이므로, 간파되는 모든 안일과 집착에 대항하여 온갖 고행의 항목이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기복이나 개벽의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구도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교리에서나 실제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기복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교리상으로 원래 권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복을 비는 것이라는 뜻에 한정하지 않고, 논의를 좀더 넓은 마당에 가져가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개 중생의 세간적인 삶은 온갖 제약된 실존의 조건에 얽혀 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해당되지 않는, 무한히 넓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차원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조화(造化)의 힘을 감지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특성이다. 그것은 꼭 인격적인 신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이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나 조화주 같은 것은 꿈에도 믿지 않으면서도, 밤하늘 가득히, 또 깊숙히 인지를 압도하는 숫자로 박혀 있는 별들을 곰곰히 쳐다보고 있으면 흔히 무한이니 영원이니 오묘함이니 불가사의니 하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꼭 신적인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감득할 수 있는 세상의 성스러운 차원은 이른바 자력 신앙에 철저히 충실한 종교인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지하게 되는 것이고, 자력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불교인이 신격화된 붓다와 보살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감지하고 그 힘이 자기의 세간적 이익을 위해 작용하기를 비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러한 신행의 보다 깊숙한 원천에는 종교적 인간의 특징인 성스러움의 감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아주 간단하게 비불교적이라고 매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인들이 흔히 쓰는 불보살의 가피라는 말은 꼭 신격화된 불보살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법계라고 하는 탁 트인 무한의 마당에서 감지하는 성스러움, 신비한 힘을 표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불교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기 자신의 혁명적 변혁을 중심 주제로 한다고 해도, 세상전체를 단위로 한 변혁은 대망치 않으며 관심도 없다고 하면 그릇된 것이다. 특히 미래불인 미륵에 대한 대망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강력한 종교적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지상에 불국토를 구현하겠다는 이상은 불교인들에게 사회적 관심과 활동을 위한 원동력을 무한히 제공할 수 있는 샘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긴 세월 동안 불교의 사회적 역량이 단절된 곳이 특히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지역 대부분의 사정이다. 불교 스스로 선도하거나 깊숙히 참여치 못한 근대화의 과정 뒤에 갑자기 닥친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불교가 과연 어떻게 그 엄청난 사회적 역할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지는 예의 주시해 볼 만하다.

3. 불교와 다종교사회

(1), 현대와 다종교사회
지구촌과 다종교 사회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전통 사회는 여러 면에서 폐쇄적인 사회였다. 따라서 전통 사회는 그 성격상 여러 종교들을 한꺼번에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통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종교만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중동이나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사회의 경우 대체로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 도교가 함께 존재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사회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대체로 어느 하나의 종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다른 종교의 존재는 유명무실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전통 사회는 명실상부한 다종교 사회였다고 하기 어렵다.

반면에 일부 극단적인 예외를 제외한다면, 현대 사회는 개방된 사회로서 다양한 종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명실상부한 다종교 사회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밖에 모른 채 폐쇄주의를 고수하던 서구의 전통 사회가 타종교들을 또 다른 하나의 종교로서 동등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지난 1965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타종교는 종교가 아닌 혹세무민의 사설(邪說)이거나 미신일 뿐이었다. 동양의 전통 사회들은 타종교에 대해 비교적 덜 적대적이어서 타종교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는 것은 어떠한 종교도 끝내 포기하기 어려운 모든 종교의 본질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남녀간의 사랑과 같은 것이어서 다분히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종교의 어떠한 절대성 주장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이론이 없지는 않았으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예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의 짧은 기간에 상황은 급변했다. 급속도로 발달한 교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지구에는 한 개의 마을밖에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24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할 공간은 지구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는 그대로를 실시간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에 의해 시공간상의 절대 거리가 상대화됨으로써 지구는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러한 정황 때문에 지구촌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다종교 사회가 된 것이다.

한국과 다종교 사회

이러한 세계적 정황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이라고 하는 특수 지역만을 한정적으로 살펴보면 다종교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경우 등록된 종교 단체만 해도 수 백여 개에 이르고 종교 공동체임을 표방하고 활동하는 단체들은 수 천여 개가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공신력 있는 가장 최근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50.7%가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 인구 중에서 불교 신자가 23.2%로 제일 많고, 19.7%의 개신교, 6.6%의 가톨릭이 차례로 그 뒤를 잇는다. 유교 신자의 수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사 방법의 한계 때문이다.
 
종교에는 다른 사회 조직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지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제도 종교가 있는 반면에, 그런 조직을 갖지 못하지만 사회 생활과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교 무속 아프리카 종교 등의 확산 종교가 있다. 확산 종교는 발휘하는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종교 소속감은 훨씬 낮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은 조사 수치로 나타난 50.7%보다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한국의 종교 인구 50.7% 중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49.5%를 차지함으로써 한국의 종교인들은 대체로 불교 신자가 아니면 기독교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 4명 중에 한 명은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3명 중에 한 명은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소수이지만 유교와 같은 전통 종교,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한국 종교, 그밖에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신흥 종교의 신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먼 듯 여겨지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수 만 명에 이른다. 그래서 흔히 종교학자들은 한국을 두고서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등의 소규모 단위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모두 다종교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인간 사회의 최소 기초 공동체인 가정마저도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 형제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요즈음은 부부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주말이면 서로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사찰이나 교회로 따로 가거나 아니면 격주로 번갈아 다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다종교 현상은 우리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정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사람들에게 한국 가정의 이러한 다종교 현상은 지금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교 사회나 이슬람교 사회에서는 한국사람들처럼 개인 각자가 주체적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그 사회의 종교에 의해 선택 당하게 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국가는 이제 흔치 않지만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제국주의적 종교였다. 그 시대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성 종교를 거부하는 것은 곧장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다종교 상황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종교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가정의 기성 종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종교 선택에 거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가정이 핵가족화되면서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다종교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필연적 문제

이처럼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장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다종교 사회는 문화적인 은혜와 기회의 현장이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인류의 문화 유산 가운데서 종교 문화가 차지하는 양은 압도적이다. 종교 문화가 인류의 삶에 갖는 중요함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이전과 이후까지 걸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일 단일 종교 사회에 산다면 다양한 종교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그만큼 폭넓게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을 지도해 온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서구 문명을 형성한 두 뿌리 중의 하나인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선택하여 누리거나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이슬람교까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 이외에는 접촉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이슬람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문화 선택의 폭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종교 사회는 다양한 인류 문화의 유산을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는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한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함께 그것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란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 혹은 최고시하는 반면 남의 신앙은 오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종교는 신앙을 결코 기호(嗜好)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라면 된장을 좋아할 수도 있고 치즈를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기호품에 대한 우열을 논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렇지 않다. 신앙이란 기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이란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나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나 기독자가 아닌 사람은 불행한 사람 혹은 적어도 덜 행복한 사람이다. 불자나 기독자들은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종교인이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권면(勸勉)하지 않는다면 그는 덜 성실한 종교인이다. 사랑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사람을 성실한 기독자나 불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 들지 않는 불자라면 그는 자비심이 넘치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하려 하지 않는 기독자라면 그는 사랑이 충만한 기독자는 아니다. 성실한 종교인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성실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반드시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 즉 종교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갖는다. 문제는 모든 종교인의 이러한 "태도"는 같은 반면에, 전달하고자 하는 그 "내용"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내용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할 경우 긴장과 갈등은 예상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독선주의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남녀간의 애정 관계처럼 어느 정도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반목과 겹치게 될 때, 그것은 심각한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갈등과 알력은 동서양의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거의 예외 없이 존재했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을 한 종교가 독점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가 나누어 갖게 될 때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은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남달리 더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소개되면서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한국에서 다종교 상황이 야기(惹起)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해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 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던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서면 대체로 점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타종교를 향한 4 가지 태도

다종교 사회가 노정(露呈)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즉,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타종교를 대하는 우리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며, 종교인은 본성상 어느 정도 독선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타인의 신앙을 대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좀더 자세히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주의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대략 네 가지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먼저 배타주의를 들 수 있다. 배타주의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종교를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 중에서 이제 한국 사람들 자신의 일부가 된 기독교가 가장 대표적이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종교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주의적 태도를 갖는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여긴다.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면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면 오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기 때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허위나 오류일 뿐이기 때문에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은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이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적용했던 가치관을 자신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타종교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제국주의는 획일화를 추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러나 탈 현대의 포스트모던주의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한다. 배타주의는 이러한 현대 사조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전제 앞에서 양식 있는 지성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있다.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을 예외 없이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포괄주의는 일단 다른 종교들을 송두리째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다르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어느 정도 참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참의 요소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자신의 종교에 궁극적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를 우열 관계로 파악한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최고의 진리요 최종적인 진리인 것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적 포괄주의자는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교회 밖에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자들의 경건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그리스도인으로 그것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자들을 두고 아주 낮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예수를 예수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불자들이 기독자들을 익명의 불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낮은 단계의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결국 자신의 종교로 수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다만 포괄주의는 배타주의가 내놓고 휘두르던 칼을 꽃다발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종교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즉, 포괄주의 역시 자기 신앙의 완결성을 믿는다. 포괄주의는 어느 정도 개방적 태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그 개방적 태도는 자기 개방성이 아니라 타종교를 자기 종교로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전략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 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放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정도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 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 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放棄)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끝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3). 종교간의 대화

대화의 불가피성

종교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분쟁의 문제를 결코 방치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세계적 유산을 한 줌의 재로 태워버리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지구촌의 현실은 세계 시민에게 결코 남의 문제일 수 없다.
 
다원주의는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문제들을 종교간의 대화로써 대처하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가 갖는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해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간에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분명한 이유는 신앙이 서로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세계 시민이 지켜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전제이다. 평화로운 공존은 분명 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이다. 종교간의 심각한 분쟁이 몰고 올 눈에 뻔히 보이는 공멸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다. 종교인들은 그보다 앞서 아직 남아있는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만큼 인류는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종교 외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종교적 선택을 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어쩔 수 없이 관용과 대화로 내몰린다면 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소극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일 수만은 없다. 이는 자기 개방을 기초로 한 열린 종교인으로서의 진리 추구나, 타종교인에 대한 이해나, 그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적 공존이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대화의 본래 목적들은 희생되고 만다. 배타주의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정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면, 평화적 공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평화적 공존이 우선적 목적이 되면 진리의 판단과 실천을 통한 행복 추구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유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공존도 대화의 분명한 목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의 필연적 이유를 종교 자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종교간의 대화의 고민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했다. 종교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타종교를 향한 대화의 시도는 전략적 위장이기 쉽다. 열성적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신앙을 타종교인에게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종교가 자기 완결성을 고집 하는 한 타종교를 향한 어떠한 대화의 시도도 전략일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다.

진정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 인정이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은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전제인 것이다. 즉, 전략적인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지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쇄신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본성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자기 독점권을 양보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간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의 고민이 자신의 신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하는 것이라면, 그 고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으로써 쉽게 해결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심한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는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현실적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은 "자신이 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타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반드시 타종교인을 위해 필연적인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타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성실한 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이나 자비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전제되며,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전제로 하며,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위해서는 정직한 대화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도모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온전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반드시 타종교인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타종교인과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기피하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불자나 기독자는 온전하고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남는다.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기 위해서 대화에 임한다 하더라도 정직한 자기 개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지향하는 개종주의나 성전주의 역시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략적 대화가 아닌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직한 자기 개방성이야말로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필요한 결정적 대전제인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한국의 다종교 사회는 물론 동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종교간의 대화에도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종교간의 대화에 결정적 대전제가 되는 자기 개방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이들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가 되었다.

(4). 불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자기 완결성을 믿는 종교

기독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십자가로써 상징하고자 한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스스로 올라가 매달린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통해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
 
모든 인간은 예수의 희생으로써 속량(贖良)받는 것이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다. 선물은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물이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징벌 대신에 선물을 준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예수의 십자가 희생이라는 한 번 뿐인 유일회적 사건을 통해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징벌 대신에 무조건적인 선물을 주는 구원 사업을 펼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구세주, 즉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는 구원의 절대 전제이다. 예수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희생적 은총 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구원의 완결 조건이다. 구원은 선물이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미 인간에게 주어졌다. 구원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완결되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일, 즉 십자가 사건을 구원 사건으로 수납하는 일뿐이다. 이제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외의 어떠한 구원 행위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단 한 번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은 온전히 완결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한 분뿐인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서 구원은 결코 논의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구원 조건을 논할 필요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며 완결 조건인 것이다.

우리는 앞서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는 전략이 아닌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리고 정직한 자기 개방이란 일종의 자기 부정, 즉 자기 완결성의 부정이라고 했다. 자기 개방으로 열려 있지 않는 한, 즉 자기 완성을 주장하는 폐쇄주의에 갇혀 있는 한, 정직한 대화란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독교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대체로 개종주의나 성전주의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태도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일 개종주의자가 대화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전략적 기만이기 쉽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독점권, 즉 기독교의 절대성과 완결성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전략적 대화가 아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진실로 가능할까? 요즈음 이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분분하게 진행중이다.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시도는 기독교로서는 자기 완결성을 포기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한 요청이 요즈음 지성적 기독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자기 초월을 지향하는 종교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는 대화의 절대적 전제 조건이랄 수 있는 자기 부정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 전통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자기 초월적 부정의 전통이 있다.

불교는 종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불교는 종교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 예를 들자면, 불교는 자신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쯤으로 여긴다. 손가락은 달이 아니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는 수단일 뿐이다. 목표하는 바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이다. 달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해탈이다. 그런데 손가락이 달을 가리키는 수단인 줄 모르고 손가락을 달로 여긴다면 이는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아는 것이 된다.
 
달을 찾기 위해서는 손가락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시선을 계속 손가락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달을 보기 위해서는 손가락에서 눈을 떼야 한다. 손가락은 결국 부정되어야만 할 무엇이다. 불교가 자신을 손가락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기 초월을 위한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끝까지 손가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만일 손가락을 목적으로 알고 끝까지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손가락의 노예가 되어 달을 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종교를 수단으로 알지 못하고 목적으로 여겨 집착하는 행위를 두고 종교를 사물화(事物化 ; reification)시킨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웅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를 만나면 시청자들은 그를 실제의 영웅으로 착각하고 동경한다. 반대로 악역을 맡았던 배우를 만나면 그를 실제의 악인으로 여기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해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배우는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도구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도구나 수단일 뿐인 그 배우를 실재하는 인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두고 사물화의 과정, 혹은 우상화(偶像化)의 과정이라고 한다. 종교 역시 이렇게 되기 쉽다. 불교는 모든 종교를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에 불과한 종교를 진리 자체인 줄로 안다면 이는 종교를 사물화시키는 것이다. 종교를 사물화시키게 되면 종교에 집착하고 종교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임시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영원하거나 혹은 절대적인 것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는 것을 우상화라고 한다. 경전은 진리를 가리키는 수단이다. 그러한 경전을 절대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불교는 이 우상화나 사물화의 과정을 철저하게 경계한다. 그래서 중국 선불교 전통의 정점에 섰던 임제선사는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고 갈파했다. 이는 사물화된 붓다나 조사에 대한 철저한 타파를 의미한다. 그는 붓다나 조사 역시 자신의 깨달음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나 조사를 절대시함으로써 그것에 집착하고 노예가 되는 것을 질타하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이 진리로 여기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불교는 진리에 집착하는 것을 법집(法執)이라고 하여 타파하고자 한다. 이처럼 불교는 자신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데에 익숙하다. 불교는 이러한 자기 초월적 부정을 통해서 진리에로의 향상을 기도하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을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는 자기 부정이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그 자체이므로 절대 부정될 수 없다. 붓다는 자신을 진리가 아니라 진리로 안내하는 안내자로 여긴다. 불교는 이처럼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 개방에 철저함으로써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방편(方便)으로서의 종교

한편, 불교는 종교를 강을 건널 때의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배는 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강을 가로질러 건너편 언덕에 가 닿는 수단은 여러 가지다. 강은 배를 타고 건널 수도 있지만, 뗏목을 타고 건널 수도 있고, 다리를 놓아 건널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건널 수도 있고, 헤엄을 쳐서 건널 수도 있다. 밧줄을 타고 건널 수도 있고, 심지어 강 밑으로 굴을 뚫어서 건널 수도 있다.
 
불교는 이들 여러 가지 수단 중의 어느 하나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언뜻 생각하면 비행기로 건너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강 하나 건너는 데에 비행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도한 방법일 수 있다. 다리로 건너는 것은 안전할지 모르지만 무미건조하게 여겨질 수 있다. 모험가는 뗏목을 타고 건너려 할 것이고 수영 선수는 헤엄쳐서 건너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익사할 위험이 따른다. 땅밑의 터널은 한꺼번에 많은 사람과 화물을 건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야가 좁고 무너질 위험이 있다. 어느 하나도 절대적인 방법이거나 완전한 방법일 수는 없다. 각 방법마다 장점과 단점이 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어느 하나만의 방법을 이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어느 하나만의 방법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하는 사람이다. 만일 뗏목을 목적으로 알고 끝까지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뗏목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 편리한 방법, 즉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를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의사가 처방전을 쓰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붓다는 종종 자신을 의사로 비유했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진단하고 병에 따라 처방을 내린다. 감기 환자에게는 감기 약이 필요하고 심장병 환자에게는 심장 약이 필요하다. 한 가지 약으로 모든 병을 다 고칠 수는 없다. 모든 병에 한결같이 통하는 만병 통치약이란 헛된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병을 고치는 약이다.
 
괴로움이라는 병을 고치고 행복이라는 건강을 되찾게 해주는 약이다. 만일 자신의 종교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병은 사람마다 다르다. 불교는 하나의 처방전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처방전만 있어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불교라는 처방전도 수많은 처방전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 불교는 이런 점에서 자기 개방성, 즉 자기 초월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불교는 타종교를 향해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를 할 열린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는 종교

독자들은 지금 한 권의 책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 책이 언제 어디서나 책일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불교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책이란 존재는 사용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책으로 존재한다. 즉,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물체에 담긴 내용을 "읽고자"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책이 존재한다. 그 물체를 베고 누우면 그것은 책이 아니라 베개이다. 그 물체 위에 그릇을 올려놓으면 그것은 그릇 받침이다. 찢어서 오물을 닦으면 휴지가 된다. 틀어쥐고 때리면 무기가 될 것이다.
 
심지어 뜯어먹는 염소에게는 음식이 된다.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그 물체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 의해서 책이 되는 것이다. 그 물체 자체가 언제나 스스로 음식인 것이 아니라 뜯어먹는 염소에 의해서 음식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이처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따라서 불교는 자신을 어떤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 이것을 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연기(緣起)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드러나는 것이 불교의 자기 개방성이다. 자신을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존재에게 자기를 열어 놓는 것이다. 이 자기 개방성은 자신을 절대시하거나 완결시 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 놓인 상대에게 영원히 열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종교

불교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성격을 대체로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눈 귀 코 혀 피부의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이 각각 그 상대인 색깔 소리 냄새 맛 사물을 감지하는 인식으로서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둘째는 의식이라는 여섯 번째 감각 기관이 이 다섯 가지의 감각적 인식들을 통합하여 모든 존재들에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하는 제6식(第六識)이다. 셋째는 제7식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과 사물의 원리를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제8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의 행위에 영향을 받아서 인식하거나, 현재의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끼치도록 현재의 행위의 결과를 간직하여 미래로 전달해주는 씨앗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인식 과정의 성격을 파악하는 이러한 불교의 입장에서 역시 불교의 자기 개방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분명 사물을 자기 중심적으로 인식한다. 반병이 담긴 술병을 앞에 놓고 "이제 반병밖에 안 남았구나"와 "아직 반병이나 남았구나"로 전혀 다른 인식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은 인간 자신의 상대적인 한계를 역설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인간은 반드시 과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며 미래의 인간은 현재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상대적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 존재가 이러한 이상 인간의 종교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어떠한 계시도 그것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다. 계시 역시 구체적이며 상대적인 역사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본다. 불교는 모든 종교가 각자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성립한 자기 자신의 역사적 한계 속에 놓여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흔히 역사적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불교는 자신의 역사적 한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또 한 번 불교가 철저한 자기 개방성을 갖고 있으며, 그로부터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고 진지하게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5).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본 요건

다종교 사회는 필연적으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을 낳는다.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은 해소되기 어렵다. 그러나 종교간의 대화는 불가피하고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대화의 절대적 전제 조건은 정직한 자기 개방이다.

불교는 정직한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불교는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데에 기독교와 달리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가 종교간의 대화에서 실제로 적극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현실에 소극적인 불자들 자신의 태도 탓도 있으려니와 대화 상대에 대한 신뢰의 상실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이제 논의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본적인 요건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기 신앙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필요하다. 대화의 당사자는 해당 종교 전통 안에서 인정을 받는 대표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신앙이 없는 비신자가 종교간의 대화 상대로 나서는 것은 대화의 본질을 흐려놓을 우려가 크다.
 
둘째, 그와 동시에 철저한 개방 정신이 필요하다. 종교간의 대화에 정직하게 임하는 사람은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에는 스스로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개종을 결단할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어야 한다.
 
셋째, 대화의 목적을 자신의 변혁과 쇄신, 즉 배움에 두어야 한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면 대화를 기만하는 것이다. 그런 목적이라면 차라리 정직하게 개종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낫다. 잠재적 자기 부정이 없다면 정직한 대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넷째, 상대의 신앙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 한 편도 공감적 이해 없이는 온전한 감상이 불가능하다. 공감적 이해 없이 타종교의 이해는 전혀 불가능하다.
 
다섯째, 진리 추구에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공유할 수 있는 진리의 추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손쉬운 절충주의나 방관주의는 궁극적 목적의 포기를 의미한다. 자신이나 상대를 너무 쉽게 인정해서는 안된다.
 
여섯째, 교리적인 간격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교육 문화 복지 인권 정의 평화 환경 등 인류 공통의 이상적 현안들을 위해 다같이 실천에 참여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교리적 간격은 동일한 목적의 실천 안에서 무기력하게 와해될 수 있다.
 
일곱째, 대화에 임하는 당사자간의 인간적인 신뢰와 유대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신앙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 요소들은 인격 안에 융해(融解)되어 있다. 대화 상대의 인격에 대한 감동은 모든 관계를 긍정적으로 이끈다.

다종교 사회는 기회인 동시에 위기이다. 다종교 사회를 기회로 삼을 것이냐 위기로 만들 것이냐는 순전히 종교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만일 이것을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은 종교인들만의 기회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온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국가적 반목 세력들에게 화해와 일치, 공존과 공영의 모범이 될 것이다. 불자들의 손에 그 기회가 주어져 있다.

4. 종교에 대한 이해

1) 원시종교

원시 종교의 특색은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즉 계시로 이루어진 경전이 없다. 또한 숭배 대상이 소박하며 윤리적, 인격적 특색이 없고 주술적(呪術的)이다.
자연 숭배(自然 崇拜, Nature worship)
천연 숭배(天然 崇拜)혹은 배물 숭배(拜物 崇拜)라고도 한다.
① 천체 숭배 - 하늘, 땅, 해, 달, 별
② 자연현상 숭배 - 번개, 우뢰, 바람, 일식, 월식
③ 자연물 숭배 - 산, 바위, 물, 하천
④ 동식물 숭배 - 동물, 거목

서물 숭배(庶物崇拜, Fetichism)

훼티코(Fetico)는 폴튜칼어로 마력 또는 호신부(護身符)를 의미 한다. 정령이나 마력이 그 물건에 붙어 있어서 그 물건을 통해 서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었다. 훼티코는 돌, 조개 껍질, 나 무 조각 등 부족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상 숭배의 최초의 단계이다. 우리 나라의 부적(符籍)도 일종의 서물 숭배로 볼 수 있다.

정령 숭배(精靈 崇拜, Animism)

사물 속에, 정령이 있어 그 정령의 활동이 인간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믿어 갖가지 방법으로 그 정령을 섬기어 화를 피하려고 하는 원시 신앙의 한 형태이다. 애니미즘은 라틴어의 애니마(anima)에서 온 것으로 애니마는 생기, 숨, 생명, 영혼 등을 뜻한다. 즉 애니미즘은 모든 사물의 현상 가운데는 애니마(anima)가 있어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테미즘(Totemism)

북아메리카의 인디안 족속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민족이나 씨 족 등과 같은 그 집단에 특정된 동식물 사이에 주술 또는 종 교적인 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 토템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동물(호랑이, 곰, 캉가루, 뱀, 악어, 원숭이)이고 다음은 식물 (나무)이며 자연물(소금, 칼, 우뢰, 해)도 포함된다. 토템은 그 부족의 상징이 되기 때문에 보호하고 엄중한 금기(禁忌)가 정 해져 있다.

금기(禁忌, Taboo)

타부란 말은 태평양 폴리네시아군도 원주민들의 말로 금지된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폴리네시아 종교에 있어서 타부는 종교적 목적 때문에 구별된 사람들이나 혹은 부정해서 격리된 사람들에게 쓰였다. 타부는 모든 사회 현상과 종교 현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금기시 되는 것으로는 머리카락, 피, 뼈, 시체, 병자, 여자, 웃음 등 종류가 많으며 집단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타부를 범하면 병이 나든지 죽든지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하였다.

2) 서구 고대종교[古代宗敎]

원시공동체 사회의 붕괴 후에 생겨난 노예제 사회의 종교. 이미 원시공산제(共産制) 사회에서 공동체의 족장이나 장로(長老)는 종교적인 권위를 가지고 그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으나, 신(神) ·정령(精靈) ·귀신 등 초월적 존재는 아직 현실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신성(神聖)은 부정한 것이고 악한 것, 또는 위험한 것으로 취급되어 아예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노예제 사회가 성립되면서 지방적인 각 공동체는 차차 하나의 권력에 의해 정복되어 고대의 대제국(大帝國)이 형성되었다. 그 후 고대사회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계급지배의 본보기가 되고, 대개의 경우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종교’의 주요한 모태(母胎)가 되었다. 고대제국의 ‘세계’에 포함되는 잡다한 요소(인종 ·언어 ·습속)는 정치적 통일이 이루어져감에 따라 점차 정리되어, 신들도 각지를 잇는 상업과 무역의 발전에 힘입어 정리 습합(習合)되어 갔다.
 
제국의 전제군주의 권력은 《신통보(神統譜)》에 최고의 신으로 반영되고, 그 밑에 우열(優劣)이 다양한 신들을 거느리면서 신들의 왕국이 형성되었다. 왕이나 귀족은 대단한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민중 위에 군림했으며, 국가종교는 종래의 공동체의 종교를 완전히 압도하였고, 민중의 생활도 신이 주는 법(윤리 ·도덕)을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방대한 신관층(神官層:司祭職)이 생겨 문화의 중심인 신전(神殿)에서 모든 학문과 문화를 독점하여 복잡하고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신학이나 의례(儀禮)의 체계를 이루어 놓았다.
 
그리고 신관(神官)은 지배자의 성화(聖化)를 위해 일했으며, 천체관측 ·점(占) ·신탁(神託)의 중개 등을 통하여 정치상의 커다란 실권을 누렸다. 신전은 또한 상업 ·군사 ·교육의 기관이기도 하였고, 많은 노예 ·재보(財寶)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비종교적인 세력과는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왕 자신이 신이기도 하였는가 하면 최고신관이기도 하였고, 또는 별도로 최고신관이 있는 등 여러 경우가 있었으나, 고대제국의 성시(盛時)에는 종교적인 세력이 정치와 분리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집트의 아멘과 라, 바빌로니아의 헬과 마르둑, 그리스의 제우스, 인도의 라흐마, 중국의 천제(天帝)를 비롯하여, 미탄니 ·하티 ·이스라엘 ·로마 ·잉카 등지에서 각각 최고신이 확립되고, 점차 초(超)인종적 세계신(世界神)으로 성장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일신(唯一神)은 되지 못하였다.
 

고대의 민중은 소박한 애니미즘 속에 살면서, 생활에 행복을 가져다 주거나 죽음 또는 질병, 재난으로써 자기네들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정령에 작용하여 생활을 지키려 하였고, 따라서 주술(呪術)과 점 ·기도 등이 성행하였다. 사후(死後)의 세계에 관한 관념이 발달한 곳에서는 피라미드 등 장대한 묘(墓)가 많이 세워졌다. 또한 서사시적(敍事詩的)인 신화가 발달하고, 특히 의인신관(擬人神觀)이 강한 곳에서는 그 예술적인 결실도 풍성하였다.
 
고대 말기에는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종전의 종교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 세계적인 인간 일반의 입장에서 다소나마 합리적이며 평등사상을 포함한 새로운 종교가 생겨났다. 인도의 불교나 자이나교에는 전통적인 브라만 종교와 대립하는 요소가 있고, 중국의 유교는 윤리면과 현실면을 강조하는 ‘계몽적’ 종교였다. 고대의 몰락, 노예제 사회의 모순이 심화(深化)되면서 동방 지중해 연안에서는 민중들 사이에 개개인의 구제를 중심으로 한 밀의종교(密儀宗敎)가 유행하는 한편, 유대교를 모태로 하는 그리스도교가 보편적 세계종교로서 눈부시게 퍼져 나갔다.

3) 조로아스터교

교도 자신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다 하여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현교(鹽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조로아스터교는 인도가 원산지가 아니라 고대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의 종교였다. 대게 현재의 인도민족을 아리아인이라 분류하는데, 이란의 페르시아족역시 이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인도인들이 아주 종교적인 민족이었듯이, 이란역시 한 종교한다는 것은 현재 이란의 정치체제가 세계에서 유일한(앞으로 탈레반이 잡고 있는 아프카니스탄도 그 가능성이 있지만) 신정일치의 정치체계라는 것에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와 고대 브라만교와의 유사성도 많이 지목되는 지점인데,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와 고대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와의 유사성이라 할것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는 짜라투르스타(가 영어식 표기고, 원래발음은 조로아스터) 인데, 그 역시 30까지 고행으로 일관하다 깨달음을 얻은후 77세가 될때까지 가르침을 폈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인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의 종교적 공유재산에 근원을 둔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경전 《아베스타》에 의하면, 태초에 앙그라 마이뉴(훗날의 아리만)는 악을 택하고, 스펜타 마이뉴(아후라 마즈다의 성령)는 선을 각각 택하였다. 신자도 생각 ·말 ·행동에서 어느 것을 택하는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한쪽은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상호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의 천사들이 원래의 자연종교적 ·물신숭배적(物神崇拜的) 특성이 약화되고 아후라 마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비주체적 천사가 되어, 저마다의 추상적 직능이 이원론과 함께 강조됨으로써, 악의 천사들은 주체성을 회복하고 아후라 마즈다와 직접 대결하게 된다.
 

종말론은 2단계로 되어 있다. 사자(死者)의 육체는 그들의 독특한 장사(葬事)법인 풍장(風葬) ·조장(鳥葬)에 의해 독수리와 들개들의 밥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의 입구까지 와서 올바로 믿은 자는 그곳에 있는 다리(칼이라고도 한다) 위를 안내받으면서 무사히 건너 천국에 들어가나, 거짓으로 믿은 자는 발을 헛디뎌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한편 조로아스터가 가고 3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천국 ·연옥 ·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용해된 금속으로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악은 멸한다고 한다. 이 사상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의 일부 등 그 후 종교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재 인도의 조로아스터교인들은 본국에서 이슬람세력의 박해를 피해 구자라트의 마하라자에게 정착하게 되면서 인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현재는 뭄바이의 7만명가량을 포함해, 인도전체 10만명의 신도를 거느리는 세계 최대의 조로아스터집단이 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인들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관계로 그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다.

4) 유대교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종교로서, 하느님의 임재를 인간행위와 역사에서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이다. 유대교는 광의로는 아브라함·이사악·야곱 등 족장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4,000여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종교현상 전부를 뜻하며, 협의로는 BC 5세기 유대 민족이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유대교를 재건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400여 년 동안 믿어온 신앙체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협의의 유대교 통사만을 다룬다.
유대교 재건 시대(BC 538~333)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패망하는 과정에서 엘리트 유대인들은 3차례에 걸쳐(BC 597, 587, 582) 신바빌로니아로 끌려가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BC 539년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황제가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이듬해 칙령을 내려, 신바빌로니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성전재건을 명했다(에즈 1:2~4, 6:3~5). 세스바쌀과 그의 조카 즈루빠벨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동족들을 데리고 귀향해서 성전재건에 진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 귀향하지 않고 눌러 살던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귀향자들은 너무 곤궁해 생계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거의 한 세대가 지나 즈루빠벨은 다리우스 황제의 지원을 받아 BC 515년 3월 드디어 성전을 완공하고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레위인·평신도 가릴 것 없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신앙생활이 위태롭게 되었다(〈이스라엘의 역사 A History of Israel〉). 페르시아 황제 아르닥사싸 1세(BC 464~424 재위)의 술 시중을 들던 유대인 느헤미야가 BC 444년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BC 437년 12월에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마쳤다(요세푸스의 〈유대교사〉). BC 433년 느헤미야는 총독 임기를 마치고 궁정으로 돌아갔다가 1~2년 후 다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십일조를 바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하고 혼종혼(混宗婚)을 금했다(느헤 13).

 
BC 428년을 전후하여(〈이스라엘의 역사〉) 느헤미야에 이어 제사장이며 율법학자인 에즈라가 아르닥사싸 1세의 명으로 모세의 법전을 갖고 유대로 와서 초막절을 맞아 본격적으로 율법을 가르쳤다(느헤 8). 그는 이방인들과 맺은 혼종혼을 모두 파기하여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두 내보내도록 명했다(에즈 9:2, 10:2~43). 유대인들은 에즈라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기로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 가운데서 사위를 맞이하거나 며느리를 보지 않을 것, 이 땅에 사는 다른 민족이 안식일에 곡식이나 그 무엇을 팔러 오더라도 사지 않을 것,……7년마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 들이지 않을 것, 남에게 빚준 것이 있으면 없애버릴 것, 우리 하느님의 성전행사를 위하여 해마다 1/3세겔씩 바칠 것,……우리 밭에서 나는 햇곡식과 처음 딴 과일은 해마다 야훼의 성전에 바칠 것, 법에 있는 대로 맏아들과 처음 난 가축, 곧 갓난 송아지나 새끼양을 우리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들에게 바칠 것"(느헤 10:31~37) 등이며 또한 십일조를 바치기로 다짐했다(느헤 10:38~39). 에즈라가 예루살렘에 갖고 온 모세의 법전이 정확히 어떤 책이었는지는 계속 논란이 되고 있으나 모세5경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독립국가는 아니었지만 모세의 법전을 생활신조로 삼은 율법공동체로 다시 태어났다. AD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림으로써 성전제사가 아주 사라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율법공동체로 존속할 수 있었다. 에즈라야말로 유대교를 재건한 장본인이므로 그를 제2의 모세로 일컫기도 한다. 유대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신관

바빌론 유수 이전에는 하느님을 마치 다른 인간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이후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나머지 될 수 있는 대로 의인화 경향을 피했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성서를 아람어로 번역한 타르굼에 따르면 에덴 동산을 거니신 분은 하느님이 아니고 그분의 말씀(멤라)이었다고 한다(창세 3:8). '하느님은 삼키는 불'이라는 표현을 '말씀은 삼키는 불'이라고 고쳤다(신명 4:24). 초월적인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신명(神名) '야훼'를 입에 담지 못하고 '야훼'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로 읽었다. 그밖에도 하느님 야훼를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들이 발달했는데 '이름'(마태 6:9), '하늘'(마태 5:34), '전능'(마태 26:64), '셰키나'(現存) 같은 것들이다.

선민사상

에즈라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남자들이 이방인 아내들과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다른 선민으로 자처했다. 선민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죄인들이다(마태 5:46~47, 6:7, 18:17, 사도 2:23). 이때부터 선민이 만민을 적대시하고, 따라서 만민이 선민을 적대시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율법

에즈라는 이스라엘을 율법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국가제도·성전제도 등 모든 제도가 없어져도 이스라엘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율법 중심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율법은 모세5경과 그 안에 들어 있는 규범들을 가리킨다. 이 규범들은 바빌론 유수 이전의 것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빌론 유수 이후 시대에 새롭게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옛 규범들을 시대에 맞게 해석했다(느헤 9). 이렇게 해서 미드라시 문헌(성서 주석)이 생겨났다. 율법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예언자들이 차츰 사라진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그리스 시대(BC 332~63)

BC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BC 323년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다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BC 198년에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정복되었다. 두 왕조의 영향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도시에 사는 부유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갔다. 대제사장 야손(BC 175~172 재임)과 메넬라우스(BC 162 죽음)가 헬레니즘 전파에 앞장섰다. 마침내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를 금지하고 이 금령을 어기는 유대인들에게는 심하게 박해를 가했다. 이에 마카베오, 일명 하스모네 가문에 속하는 제사장 마따디아와 그의 5명의 아들이 봉기하여 164년 12월 성전을 정화하고 다시 제사를 드렸다(I마카 4:36~40). 이를 기념하여 유대교에서는 유대력으로 기슬레브 달 25일부터 8일 동안 성전봉헌 축제(하누카)를 지낸다. 하스모네 가문 중심의 독립전쟁이 차츰 승리하여 마침내 하스몬 왕조(BC 142~63)가 수립되었다.

독립전쟁에 승리하는 것은 다행이었지만 하스모네 가문은 그만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제사장직을 독식하는 잘못을 범했다. 마따디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C 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사장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제사장 직분까지 겸직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하던 경건자들(하시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는 경건자들이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는 경건자들이 에세네파를 만들었다.

이당시 이스라엘 종파의 성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 못지않게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전통도 존중했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의 계율을 다 지켰다. 또한 이들은 섭리, 천사, 내세에서의 보상,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파는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2번째로 쿰란 종파가 있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자 제사장이던 '의로운 스승'은 저항하다가 모진 박해를 겪었다(하바꾹 주석 8:8~13).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 때(BC 103~76) 매우 번창했으나, AD 68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본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했다. 성교와 사정에서 생기는 불결을 피하려고 수도자들은 독신생활을 했다.
 
3번째 종파는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들이 속한 사두가이파이다. 이들은 헬레니즘을 숭상하고 하스모네 왕가 및 로마 식민정권과 결탁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됨과 더불어 해체되었다. 이들은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했으며 오직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들었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사도 23:6~8) 영혼불멸과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정결법·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지식인들은 이들을 '땅의 백성'(암 하레츠)이라 부르며 멸시했다. 이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50만~70만 명쯤 되고, 해외에 이민가서 살던 유대인들은 200만~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유대인들은 시리아·소아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서 많이 살았다. 서기 원년 무렵에 지중해 주민 중 10%가 유대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BC 5~4세기의 유대인 수에 비해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수가 급격히 불어난 까닭은 이방인들을 많이 입교시켰기 때문이다. 그 예로 BC 130년 요한네스 히르카누스와 BC 103년 아리스토불로스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 이두매아 사람들과 북부지역 이두레아 사람들을 강제로 대거 입교시켰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이 BC 3~1세기에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BC 1세기에 씌어진 〈아리스테아 편지 Letter of Aristeas〉에 따르면 역자 72명이 〈구약성서〉를 각자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했는데, 역문들을 비교해보니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이 역문을 70인역이라 한다. BC 1세기에 마카베오 2~4서도 이집트에서 씌어졌다.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에서 배출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필론(BC 20경~AD 50)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유대교 신앙 간의 융화를 시도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우의적 방법으로 성서를 풀이했는데, 이 주석 방법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팔레스타인에서 씌어진 작품으로는 우선 쿰란 문헌을 꼽을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작품들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성서 전설 또는 성서 주석류로 〈욥 유언집〉·〈이사야 순교기〉·〈아담과 하와의 생애〉, 쿰란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토비트〉·〈수산나〉·〈벨과 뱀〉 등이 있고, 묵시문학으로는 〈다니엘〉·〈에녹〉·〈모세 승천기〉·〈시리아어 바룩〉·〈에스드라 4서〉·〈아브라함 묵시록〉 등이 있으며, 역사서로는 요세푸스(AD 38경~ 100 이후)가 쓴 〈유대 전쟁 Bellum Judaicum〉·〈유대 고대사 Antiquitates Judaicae〉가 있다. 그밖에 요세푸스는 〈자서전 The Autobiography of Josephus〉·〈아피온 논박 Contra Apionem〉을 썼다. 지혜문학류로는 시라크의 아들 예수가 BC 180년경에 쓴 〈집회서〉·〈12족장의 유언〉 등을 꼽을 수 있다.
 

로마 시대(BC 63~AD 135)

여기서는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때부터 AD 135년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이 실패로 끝난 때까지를 로마 시대로 본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중요한 사건들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열심당 결성
AD 6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르켈라우스 왕을 폐위하고 코포니우스를 그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코포니우스 총독은 자기 관할지역에 주민세를 부과했다. 주민세는 12(또는 14)~65세의 주민은 누구나 1데나리온씩 바쳐야 하는 인두세였다. 이에 갈릴리 지역 가믈라 요새 출신 유다가 주민세 거부운동을 벌이고 동지들을 모아 열심당(젤롯당)을 조직했다. 그들이 내세운 기치는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며 황제의 흉상과 황후의 좌상 따위가 양각된 은화 데나리온을 세금으로 바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었다(마르 12:13~17). 열심당원들 가운데서도 극력분자들을 일컬어 자객들(sicarii)이라고 한다.

제1차 유대 독립전쟁
AD 66년 여름 플로루스 총독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자 카이사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정권에 반대하여 봉기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라는 요구를 받고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스의 〈교회사〉, 에피파니우스의 〈반이단론〉).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68년 6월 21일 예리고를 탈환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13㎞ 떨어진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70년 유월절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4개 여단(약 2만 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8월 29일 성전구역을 점령하여 성전을 불지른 다음, 9월에는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와 헤로데 왕궁까지 점령했다. 그렇지만 사해 서안에 있는 천연 요새 마사다에서는 자객들이 74년 유월절까지 저항하다가 실바 장군 휘하의 로마군 제10여단에게 점령될 지경에 이르자 자객 96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이스라엘의 성지〉).

야브네에서 유대교 재건
제1차 독립전쟁이 실패하자 독립전쟁을 주도한 열심당과 자객당, 상급제사장·대지주·귀족 중심의 사두가이파, 쿰란 수도원 중심의 에세네파가 모두 소멸하고 오직 바리사이파만이 건재하게 되었다. AD 70~80년 율법학자 요하난 벤 자카이는 바리사이파들을 이끌고 텔아비브 남동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야브네(그리스어로는 얌니아)로 가서, 성전이 파괴되었으므로 오로지 율법 중심의 유대교를 재건했다.
 
그는 율법학교(베트 미드라시)를 개설했고, 그의 후임자 가밀리엘 2세는 최고의회(베트딘)를 창설하여 유대교 최고의결기관으로 삼았다. 100년경에는 히브리어·아람어 〈구약성서〉의 범위를 확정했다. 그렇지만 〈아가〉·〈전도서〉·〈에즈라〉를 두고서는 경전이냐, 위경이냐의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가 하면 85년경 야브네에서 작은 사무엘 랍비가, 유대인들이 회당 예배 때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슈모네 에즈레, 아미다라고도 함)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 기도문(비르카트 하 미님)에 나자렛 사람들(그리스도교도들)을 덧붙였다고 한다(바빌로니아 탈무드). 그결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어 명실공히 독자적 종단으로 독립했다. 제12조항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과 이단자들은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씌어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

제2차 유대 독립전쟁
115~117년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 때 리비아 키레네 출신 유대인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면서 이집트·키레네·키프로스·메소포타미아 유대인들을 사주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132~135년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가 제2차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당대의 석학 율법학자 아키바는 그를 메시아로 추대하여,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별의 아들'(바르 코크바)이라고 선언했다. 135년 바르 코크바는 베들레헴 근교의 바티르 마을 전투에서 전사하고, 아키바는 유대인들을 부추긴 죄로 로마군에게 처형되었다.1952~61년에 사해 서쪽 헤베르 계곡에서 바르 코크바의 서간집이 발굴되었다.

예수와 그리스도교

에즈라 이후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27년경 예수가 출현하여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고 그에 대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다. 그는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게 능사가 아니고, 하느님과 이웃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과 이웃에게로 '돌아섬'을 강조했다. 이는 신선하고 충격적인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그는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식민정권의 미움을 사서 30년 4월 7일 금요일 오후 예루살렘 북부 성곽 바깥 골고다에서 약 33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에서 막을 내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를 처치했지만 하느님은 그를 정당화하여 그를 부활시켰다. 제자들은 수시로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고, 마침내 30년 오순절 예루살렘에 순례온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창교했다. 예수는 이단자가 아니라 예언자요 메시아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대인 동족 가운데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극히 적은 반면, 그리스도교 창교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이방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로 몰렸다.
 
기성종교인 유대교와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 간의 결별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차 유대 독립전쟁(66 ~70) 때 유대계 그리스도교도들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요르단 강 건너,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28㎞ 떨어진 펠라로 피신했다. 85년경 유대인들은 야브네에서 18조 기도문 중 제12조 기도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을 단죄하는 구절을 덧붙였다. 115~117년 키레네 출신 루쿠아스 안드레아스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와 제2차 유대 독립전쟁(132~135) 때, 바르 코크바가 메시아로 자처하여 독립운동을 할 때 그리스도교도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랍비 시대(1~18세기)

탄나임 시대
기원 전후에 활약한 힐렐과 샴마이 때부터 200년경 미슈나 편찬 때까지를 탄나임 시대라 한다. 70년 야브네에서 유대교가 재건되었으나 제2차 유대 독립전쟁 때야브네 주변이 몹시 위태로워진 까닭에 최고의회는 갈릴리 우샤, 베트 셰아림, 세포리스, 티베리아스로 전전했다. 성전과 제사 대신 성서와 기도 중심의 유대교가 야브네와 갈릴리에서 확립되었다. 갈릴리에서 초창기에 최고의회를 주재한 이들은 시메온 벤 가말리엘(135경~175경 재직)과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유다 하 나시(175경~220 재직)였다. 유다는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던 율법을 집대성하여 200년경 우샤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율법집을 펴냈으며 이것이 미슈나이다. 미슈나에는 잡다한 율법들이 6부 63장으로 분류되었다. 이어서 미슈나에 빠진 전승들을 모아 율법집, 즉 토세프타를 펴냈다. 탄나임 시대에 모세5경 주석서들도 편찬되었는데, 〈출애굽기〉 주석서 메킬타, 〈레위기〉 주석서 시프라, 〈민수기〉·〈신명기〉 주석서 시프레, 〈민수기〉 소주석서 시프레 주타, 〈신명기〉 주석서 미드라시 탄나임 등이 있다.

아모라임 시대
200년경 율법집 미슈나가 편찬됨과 아울러 그 율법집을 풀이하는 아모라임(해석자들) 시대가 시작된다. 아모라임의 율법해석을 집대성한 문헌이 〈탈무드〉인데, 2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팔레스타인 탈무드, 일명 예루살렘 탈무드인데, 이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카이사리아 학파와 세포리스 학파의 해석을 모아 5세기초에 편찬한 것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씌어졌다. 2번째는 바빌로니아 탈무드인데 메소포타미아에 이민 가서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주로 네하르데아·품베디타·수라 학파의 해석을 모아 7세기초에 편찬되었다.

640경~1038년 바빌로니아 학파가 지중해 이슬람 지배권 영역에서 득세하여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통용되던 시대를 일컬어 게오님(geonim 尊者) 시대라 한다. 바빌로니아 학파 게오님의 영향으로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모든 유대 공동체에 통용되는 보편적 율법집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기를 든 운동도 있었다. 8세기에 아난 벤 다비드가 일으킨 카라이트(히브리어로는 카라임) 운동이 대표적이다. 이 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① 성서 중심주의에 의하면 랍비들의 율법은 인위적 계율이다. ② 메시아의 구원을 재촉하고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 ③ 성서를 재검토하여 율법과 교리의 진수를 찾아내야 한다. 9세기에 이르러 카라이트 운동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유대 공동체에까지 전파되었다.

중세 유럽 유대교
950~1750년의 중세 유럽 유대교는 그리스도교 지배하의 프랑스·독일에 자리잡은 아슈케나짐과 이슬람교 지배하의 남부 스페인에 자리잡은 세파르딤으로 양분된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 곧 세파르딤은 이슬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에 융화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매우 폭넓은 저술들을 남겼다. 가장 출중한 석학으로는 마이모니데스, 일명 모세스 벤 마이몬(1135~1204)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남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한동안 카이로 이집트 궁정에서 활약하다가 이집트 혹은 이스라엘에서 죽어 티베리아스에 묻혔다. 그는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따라 유대교를 이해했다. 율법에 관한 저술들로는 미슈나 주석서, 〈세페르 하 미츠보트 Sefer ha-mitzwot〉(613개조 명령과 금령), 〈미슈네 토라 Mishne Torah〉(율법 전집 14권)가 있다. 1492년에는 스페인에서, 1497, 1506년 포르투갈에서 유대인들이 각각 추방됨으로써 이 지역의 유대교는 붕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프랑스와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곧 아슈케나짐은 도시 중심부에 자기네끼리만 모여 살면서 상업에 종사했다. 상거래가 아니면 그리스도교도들과 상종하지 않고 게토 안에서 자기네 방식대로 살았다. 제2차 십자군원정(1147~49) 이후에 독일 유대계에서는 신비주의자들(하시딤)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고행·순교·속죄 행위 등을 강조했다. 아슈케나짐의 최대 석학은 독일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트루아에서 가르친 랍비 솔로몬 벤 이삭(약칭은 라슈)으로서 그의 성서 주석과 바빌로니아 〈탈무드〉 주석은 너무도 뛰어나서 성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 모든 판본에 함께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역에서 카발라(전통)라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카발라의 대표적 경전은 〈조하르 Zohar〉(광채)이다. 〈조하르〉 가운데서 오래된 부분은 모세스 벤 솀 톱 디 레온(1305 죽음)이 쓴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35㎞ 떨어진 제파트로 몰려들어 제파트를 카발라 성지로 만들었다. 여기서 돋보이는 신비주의자로는 이사크 루리아(1531~1573)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이 겪는 여러 가지 환난은 신성(神性)의 생기가 억눌린 것을 반영한다고 보고, 신성의 생기를 해방하는 신비신학을 주창했다.
 
카발라 운동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샤베타이 체비(1626~76)의 출현이었다. 그는 투르크의 스미르나에서 태어나 하느님의 존함 '야훼'를 발성하는 등 괴상한 짓을 하더니, 1665년 4~5월 이스라엘 가자에 가서 카발라 신비주의자 나단 벤 엘리샤를 만나고 메시아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신비주의자 나단에게 설득되어 1665년 5월 31일 가자에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포하여 큰 소동을 일으켰다. 9월 초순 스미르나로 돌아와서는 몇 달 동안 비교적 조용히 지냈으나 12월 11일 자신이 메시아라고 재차 선포함과 아울러 1666년 6월 8일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노라고 장담했다.
 
1666년 2월 6일 이스탄불로 가려고 마르마라 내해(內海)를 항해하던 중에 오스만 투르크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는 사형을 받든지 이슬람교로 개종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강요를 받고 9월 15일 에디르네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한동안 황실 은급을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중 신앙생활(카발라 메시아니즘과 이슬람교)을 한다는 죄목과 방종한 성생활을 한다는 죄목으로 1672년 8월 이스탄불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이듬해 1월 알바니아 둘치뇨로 유배되어 1676년 9월 17일 속죄일에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견자 나단은 그가 체포된 것,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 유배가서 죽은 것을 모두 신학적으로 설명한답시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와 메시아니즘의 허구성이 생생히 드러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현대 유대교(1750~)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에 살던 유대인들 중에서 은행가와 공장주 등으로 성공한 이들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회와 접촉이 잦게 되었다. 그결과 멘델스존(1729~86) 같은 계몽철학자가 나타났다. 그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 신앙과 서구 계몽사상의 융합을 시도했다. 18~19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대교를 당시 사회와 사조에 적응시키려는 개혁운동이 계속되었다.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하여 기존 미국 유대교 개혁자들과 합세함으로써, 1880년 미국 유대교 200개 회당 거의 전부가 개혁 유대교로 기울어졌다.

그렇지만 서유럽의 유대인들 대다수는 조상 전래의 유대교를 돈독히 지키면서 아울러 문화적으로는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신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동유럽에서는 18세기에 하시딤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카발라 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킨 것이다. 하시딤 운동은 철저히 카리스마적 지도자(rebbe)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지도자끼리 다투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지도자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으나 나중에는 세습되었다. 예루살렘의 하시딤은 메아셰아림 지구에 모여 산다.
 
19세기 말엽에는 시온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작가 테오도어>헤르츨(1860~ 1964)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다는 기치 아래 1897년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세계대회를 열었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 J.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찬동한다고 선언했다. 1918년 영국군은 독일과 동맹을 맺은 터키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초에 서구의 유대인들이 히틀러의 박해를 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아랍 원주민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국제연합이 이스라엘 독립을 승인한 데 이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결과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다.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49), 시나이 전쟁(1956), 6일전쟁(1967), 속죄일 전쟁(1973),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1982), 아랍인 봉기(인티파다, 1987~) 등 분쟁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교의 예수관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야브네 시대(70~135) 이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민족 배반자, 종교 배신자로 배척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수와 그리스도교도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히브리대학교 교수이며 시온주의자였던 J. 클라우스너(1874~1958)는 예수를 위대한 윤리 스승이라고 했다. 영국에서 유대교 개혁운동을 일으키고, 시온주의와 밸푸어 선언을 반대한 C. J.G. 몬테피오레(1858~1938)는 예수를 새로운 모습의 예언자라 했다.
 
독일의 진보적 랍비 레오 베크(1873~1956)는 예수를 일컬어 유대교의 순수하고 선한 요소를 체현한 사람이라고 했다. 미국의 보수적 랍비 밀턴 스타인벡(1903~50)은 예수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이라고 했다. 비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한 마틴 부버(1878 ~1965)는 예수를 대형(大兄)이라고 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중 유대인들에 관한 항목에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친교를 권하고 성서와 신학 공동 연구를 격려했다. 이처럼 20세기에 이르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가 조금 개선되었지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鄭良謨 글


5) 그리스도교
AD 1세기에 활동한 나자렛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 죽음에서 유래한 세계의 주요종교.

그리스도교도들의 수는 17억에 달하며, 로마 가톨릭교, 동방정교회, 개신교 등 3개의 주요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 3집단들 이외에도 동방 그리스도교에는 몇 개의 독립교회들이 있고, 세계 전역에는 수많은 종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와 종파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의 필요성에 대한 신념에 하나이다.

초기 교회와 후기 유대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안의 한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이방세력의 영향과 통치 아래 있었고, 그들의 정치나 문화적 업적보다는 종교에서 공동체의 구심점을 찾던 때였다. 아모스(BC 8세기 활동) 이후의 이스라엘 종교는 모든 민족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이상을 함축하고 있던 유일신 개념과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했다는 개념 사이의 긴장을 그 특징으로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의 시기(헬레니즘 시대:BC 3세기~AD 3세기)에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왕국들과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것이 유대교로 하여금 보편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방 통치자들, 특히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BC 168~165 재위)는 그리스 문화와 종교 혼합주의를 팔레스타인에 강요하고자 하였고 이는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는 주로 다음 2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첫째는 나자렛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이고 둘째는 만인을 위한 모세법의 영구적 타당성이다.
히브리 성서(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를 구약성서로 받아들였음)는 역사를 섭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로 보았으며, 이 드라마는 종국적으로 계약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모든 절망의 원천들, 즉 이방세력의 지배 혹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하느님의 통치는 BC 10세기에 이스라엘 왕으로 활동하였던 다윗 계열의 기름부음 받은 왕, 즉 메시아에 의해 수립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대단원의 막에 이를 것인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사두가이파는 모세5경만을 성서로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바리사이파는 5경 이외의 성서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 천사의 존재에 대한 교리 등 그 당시 유대교에 수용된 교리들을 포용하였다.
 
이 교리들은 역사의 종말이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하느님의 극적이고 대격변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는 종말론적인 대망(待望)에서 비롯되었다.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유대 의회)은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로 구성되어 있었다. 열심당은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하는 공격적인 혁명가들이었다. 그 이외의 집단들은 헤로데의 속국을 지지하는 헤로데당과 정통 유대교로부터 탈피하여 수도원에 버금가는 공동체를 이룩한 에세네파였다. 아마도 사해 두루마리를 보존한 사람들도 에세네파 사람들인 듯하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이 집단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정경(正經)으로 인정받는 복음서들(교회가 진정성을 인정하여 채택한 복음서들)에서 예수가 비판한 주요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당시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에서 사두가이파나 열심당이 지속될 가능성은 적었다. 묵시문학적인 꿈을 실현화하고자 한 열심당은 66~70년과 132~135년 2차례에 걸쳐 로마인들에 맞서 주요반란을 일으켰으나 유대의 파멸로 끝났다. 따라서 많은 유대인들은 바리사이파와 그리스도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리사이파는 모세법을 세밀한 부분까지 지키는 데 관심을 쏟았고, 그리스도교는 성서 신앙을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종교로 전파하는 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미시나(구전율법)와 탈무드(구전율법에 대한 주석과 보완)에 보존된 바리사이주의는 규범적인 유대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방인(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혁명적인 열심당과 조심스럽게 관계를 끊음으로써 유대교의 특수성과 배타성을 희생시키는 대신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소수의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유대인들로부터 공개적인 지지를 얻는 데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보다 신학자들에게 더 큰 수수께끼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신약의 자료들
나자렛 예수를 아는 데 필요한 주요자료들은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들이다. 처음의 세 복음서들, 곧 [마태의 복음서]·[마가의 복음서]·[누가의 복음서]는 문학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때문에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고 불린다. [마태의 복음서]와 [누가의 복음서]는 [마가의 복음서]를 활용한 듯하다.
 
그 형식과 내용에서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의 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보다 더 풍부한 신학적 해석을 담고 있으며, 세밀하게 살펴보면 훌륭한 역사적 정보들을 보존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두드러지게 불확실한 점은 연대이다. 마태는 예수가 BC 5년 하반기 혹은 BC 4년 상반기에 있던 헤로데 대왕의 사망보다 최소한 2년 앞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을 로마의 인구조사가 있던 무렵으로 본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인구조사는 AD 6~7년에 실시되었고 총독 퀴리니우스에 대한 봉기를 유발시켰다고 한다. 루가의 인구조사 부분은 맞지만 총독의 이름은 잘못된 것 같다.
 
예수가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때는 29~30년경인 듯하지만,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은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였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 사막의 금욕주의자로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내다보면서 회개와 세례를 설교하였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그가 출범시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라고 인정하였다. 예수는 그의 고향 갈릴리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를 생동적인 비유로 하였으며, 기적적인 치유도 베풀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공생애 마지막에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보다 더 잦았고 그의 공생애 기간이 1년 이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기록이 옳을 가능성이 많다(루가 13:7도 이 사실을 암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음). 율법준수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바리사이파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민중이 그를 보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 통치 당국의 공포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월절(BC 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에 예수가 개선하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최후의 위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고 심문을 받았다. 심문은 처음에는 산헤드린에서, 그다음에는 빌라도 앞에서 진행되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였다. 빌라도에게 제출된 고소의 내용은 반란교사죄였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이를 날조된 죄명으로 본다.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인 신앙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음을 설교하였다. 그는 어떤 본문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미래에 완성될 것으로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본문에서는 이미 와 있는 것으로 말하기도 했다. 예수의 언행은 하느님의 최후 승리로 끝나게 될 하느님 나라 과정의 시작이라고 믿어졌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였으나 정작 그가 이 호칭을 자신에게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예언자와 랍비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다.
 
그가 스스로 사용한 수수께끼같은 칭호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그는 이 칭호를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받을 고난을 언급하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장차 맡을 재판관의 역할을 언급하면서 사용하였다. 이 칭호는 [다니엘](7:13)의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환상에서 동물의 형상들과 대비되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자'는 외세에 의해 정복을 당했으나 하느님의 심판에 의해 그 권리를 되찾게 될 하느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그후 복음서 전승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초월적인 심판자라는 주제인 것 같다.

예수의 가르침은 암시적으로 혁명을 거부하면서도 기존질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폭력은 하느님 나라의 윤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광야에서 5,000명을 먹인 기적이 암시하듯이 예수의 활동이 열심당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지간에, 복음서들은 자기 역할에 대한 예수의 이해와 열심당 혁명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어두운 평가는 이처럼 혁명적 이상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취하는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회개의 복음은 각 개인과 사회가 깊이 더럽혀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악령의 세력 아래서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은 사랑과 긴급한 선교를 필요로 한다. 제자라면 심지어 원수까지 전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고, 재산과 세속적인 복락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에게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창녀들, 동족의 미움을 받는 가혹한 세리들 등)이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남을 헐뜯는 태도는 좋은 덕목이 아니었다. 국가는 어떤 점에서는 소원한 실체로 간주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과 시민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로마 황제의 권리들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요구를 이행하는 일과 양립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복음은 유대교 안에서 저항에 직면하였다.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는 초기 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인 사울(사도 바울:이 이름은 나중에 쓰여졌음)에 의해 이방인들의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울은 원시 교회를 박해한 열렬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소아시아의 타르소(다소)에서 태어난 사울은 유명한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로서 예루살렘에 와서 루가가 "헬라주의자들"이라고 한 그리스도교 집단을 괴롭혔다. 이 집단의 지도자는 스테파노(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였는데 그는 예수가 타락한 예루살렘 예배를 정화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개혁자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개종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배타적이고 특수한 유대교 의전들에 얽매일 필요없이 복음을 비(非)유대인의 세계로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바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견해가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줄곧 논쟁의 대상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통해 개종자들을 얻었으며 이 때문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바울은 교회가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확신하면서 온 인류를 향해 보편적인 선교를 펼치는 것이 곧 랍비적 보수주의에 대한 철저한 결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깨달았다.

몇 편의 무게있는 서신들이 보존됨으로써 바울은 사도 시대(AD 1세기)에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남긴 유일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그보다 나이가 많고 헬레니즘화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마찬가지로 그는 [구약성서]를 우의적(상징적)으로 해석하였으며 예수가 안식일을 자유로운 관점에서 해석했듯이 그도 문자에 대한 영(靈)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최고의 구원행위인 동시에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상에서 구원은 양심에 호소하는 도덕주의에 의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이 교리에서 바울의 선구를 이룬 사람은 필로이다. 바울은 이 교리에, 복음은 모세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는 자신의 논지를 연결시켰다. 이 논지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단의 지도 아래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많은 어려움을 불러일으켰다. 62년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권위있게 대표했다.
 
야고보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서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반율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들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베드로는 둘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했던 것 같다. 모든 복음서들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12 사도들의 지도자로서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는 어렴풋이밖에 알 수 없으나, 초기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바울과 같은 시기(64)에 네로의 박해를 받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바울의 신학에서 예수의 인간적 업적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임무에 복종하고 충성을 다한 예수의 태도는 예수의 자기희생에 도덕적이고 구속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강조점이 이와 다르게 나타난다. 2세기의 전승에 따르면 이 복음서는 에페소스에서 씌어졌는데 교회와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 정통 그리스도교와 소아시아의 영지주의 분파들 사이의 논쟁 등 당시 그 지역에서 논란이 되던 문제들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 요한의 독특한 개성은 역사적 사건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재적인 구원 경험 사이의 관계를 해석하는 그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역사를 신앙에 이르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도록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역사는 한 특수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건들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범주이기 때문에, 요한은 이전에 존재했던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육화(肉化)되었다는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 사상은 예수의 우주적인 의미가 헬레니즘 세계에 더 잘 인식되도록 도왔다. 고대 세계에서 신의 현존은 신의 영감이나 육화로 이해되었다. 공관복음서들이 신의 영감을 선택하였다면, [요한의 복음서]는 육화를 선택한 셈이다. 이 2가지 유형의 그리스도론 사이의 긴장은 4세기 후반기에 안티오크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에서 최초로 첨예화되었다.

초기 교회의 가르침과 조직
교회는 우상숭배와 이교적 성애주의(性愛主義)와 구별되는 거룩함에 관한 강한 의식을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다신교와 그것에 부수되는 관용이 고대 사회에 널리 스며 있었지만, 그당시 그리스도교의 도덕적 엄격성은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상업활동과 직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제한하였다. 세례를 받을 때, 어떤 그리스도교인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다신교·미신·부정직 혹은 악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경우 그 직업을 버려야 했다.
 
군복무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은 군인이 개종하여 세례를 받을 경우 군대를 꼭 떠나야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미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인이 정식으로 군인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주저하였다. 또한 엄격한 그리스도교인들은 가르치는 직업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사는 이교적 관념들과 외설적인 내용으로 가득찬 문학작품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연극과 춤도 달갑지 않은 직업이었고 마술은 어떤 경우에도 금지되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교 윤리는 사회로부터 다소 초연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때로 경제적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고대 사회의 구조는 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었다. 노예나 자유인이 된 사람도 자신의 생계와 앞날이 후견인에게 달려 있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막대했다. 어떤 사람의 사회적 권력은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들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달라졌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교는 1차적으로 여성과 어린이들, 특히 상류계층 여성과 어린이들을 통해 사회 속에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장이 그리스도교인인 경우에는 그에 속한 사람들도 가장의 뒤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자체는 밀접한 유대를 이루고 있었다. 3세기의 한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인들은 동료 신자들끼리 돈을 거래하기도 하고 서로 멀리 떨어진 집단들은 상업활동과 상호부조를 통해 서로 도왔다.

바울의 서신에는 매주 첫날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의 묵시록]에서는 일요일이 "주의 날"로 언급된다. 매주 일요일에 갖는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금까지 토요일에 갖던 유대인 회당모임을 대신하게 되었다. 할례 의식은 사라졌고, 입교는 세례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일마다 성찬에 참여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물의 세례는 교육(교리문답)과 금식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악을 버릴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 신앙을 공표하면서 몸을 물에 잠깐 담근다. 그다음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을 이룸을 상징하는 기름부음과 안수(견신례)로 세례의식은 전부 끝난다. 세례를 받은 사람만 최후의 만찬 때 예수가 한 말을 회상하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성찬 때는 봉헌하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임재할 것을 기원하고 거룩하게 구별된 빵과 포도주를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성찬의식에 관한 기록은 유스티누스(150경)의 저작들과 특히 로마의 히폴리투스(220경)의 [사도전승 Apostolic Tradition]에 나온다.

세례를 받은 후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교회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나 파문을 당한 사람도 시편 낭송, 성서 낭독, 설교로 이루어지는 예배의 첫부분에는 계속 참여할 수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몬타누스파와 로마 가톨릭 분파였던 노바티아누스파는 교회의 사면권을 부정하였으나 그 엄격성보다는 분파성이 더 심해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조차도 노바티아누스파를 비판할 때 그들의 엄격성보다 분파성을 겨냥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공적인 고해(告解)가 등장하였다. 고해는 금욕적 고행을 전제조건으로 일생에 단 한 번 허용되었다. 고해자들은 안수를 받음으로써 교인들과의 친교를 회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해자들은 덜 힘들고 덜 공적인 고행을 요구받았다.

제1세대 그리스도교에서 교회의 권위는 예수의 친족들이나 예수로부터 사도와 선교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사도들의 권위있는 목소리가 호소력을 가졌다. 그러나 사도들이 모두 죽자 권위의 소재와 관련해 첨예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아주 오랜 3~4세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은 주로 교직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권위가 무엇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사도회의는 보통 장로들(presbyteroi:그리스어로 사제들)이나 감독들(episkopoi: 주교들)이 참석자(diakonoi:집사들)의 보조를 받아 운영되었다.
 
성직자는 설교, 세례와 성찬,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금을 나누어주는 책임이 있었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로 구성된 단체(총회)의 수장이나 원로가 자연히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다른 교회들과 서신을 교환하였고, 이 교회들이 새 수장을 임직할 때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대표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교회의 가톨릭적 성격(보편성과 통일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성직수여식에 참여하곤 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주로 도시에서 발전했다. 시골의 농부들은 옛 방식에 집착하였으며,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 대부분이 선호하던 이교(異敎)를 믿었다. AD 400년경 토지소유자들 가운데 개종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그들은 자신의 소유지에 교회를 세우고 사제에게는 '성직록'(聖職祿)을 주었다. 이 경우 사제들 가운데는 권력자의 노예도 있었다. 아프리카 동부와 북부에서는 보통 고을마다 주교가 있었으나, 서부지역에는 주교들이 적어서 보다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다.
 
4세기 이래 이 지역들은 세속적인 용어로 주교관구라고 지칭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이와 같은 서방의 관습을 동방의 관습에 맞추어 주교의 수를 증가시켜야 한다는 압력이 강해지자 서방의 주교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그 이유는 이 조치로 인해 주교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3세기말에 관구 수도의 주교는 점차 그의 동료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갖게 되었고, 대도시의 주교(4세기 이래 수도대주교라고 지칭됨. 대주교라고 지칭되는 경우도 많았음)는 동료 주교들의 주교 서품자(敍品者)였다. 3세기의 로마 주교, 알렉산드리아 주교, 콘스탄티노플(AD 320 창건) 주교의 권위는 자신의 관구를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인들은 이 3개의 대주교 관구를 5개의 대주교 관구로 늘렸다. 파파(papa:아버지)라는 칭호는 처음 600년 동안에는 신자들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주교를 부르는 애칭이었으나 6세기 이래 로마의 주교들에게 특별히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로마 주교들에게만 사용되었다. 애초부터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를 지도해야 한다는 특별한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다. AD 165년경 로마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에게 바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베드로를 위한 기념물은 바티칸 언덕의 공동묘지에 세워졌고 바울의 기념물은 오스티아로 가는 길목에 세워졌다.
 
이 건립사업은 로마 교회가 사도전승의 수호자라는 의식을 반영해준다. 이러한 의식은 AD 190년경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춘분 후 첫 만월이 지난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지 않고 예로부터의 관습에 따라 유대교 유월절에 부활절을 지킨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사건에서 또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256년 로마의 스테파누스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위임했다는 성서 구절(마태 16, 18~19)을 근거로 권위를 주장한 최초의 교황이다.

그리스도교 성서의 형성
그리스도교인들은 처음에는 아무 논란없이 히브리 성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히브리 성서를 역사순례의 무대에서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일 사도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타당한 것이라면, [구약성서]의 율법은 더이상 하느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최종적인 말씀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 성서는 '옛 계약'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어떤 책들을 성서에 포함시켜야 하는가를 놓고 주저하였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70인역 성서)에는 솔로몬의 지혜, 집회서 등과 같이 히브리 정경에 채택되지 않았던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70인역 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오리게네스와 특히 라틴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제롬:4~5세기 활동)는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책들에 근거하여 신학적 주장을 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영어판 성서들이 히브리 정경에는 채택되지 않았으나 70인역에 채택된 구약의 일부분을 외경이라는 이름(이 명칭은 사람들을 오도하기 쉬움)으로 별도로 인쇄하는 경우는 이러한 고대 교회의 망설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고 논쟁이 많았다. 1세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행위와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때 문서전승보다는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구전전승을 더 많이 활용하였으나, 이 이야기들이 권위를 갖기 위해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마르코가 처음으로 이 이야기들을 서로 연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짜보려고 생각했다.
 
복음서들이 널리 돌려가며 읽혀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구전전승은 여전히 통용되었고 오히려 선호되었다. 그래도 공들여 복사한 문서들은 전승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 장치가 되어주었다. 공관복음서들은 AD 150년경 로마의 변증가였던 순교자 유스티누스에 의해 일찍이 종합복음서(또는 복음서들을 종합한 것)라는 형태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유스티누스의 제자인 시리아 교회의 타티아누스는 여기에 [요한의 복음서]를 추가하여(4복음서에 따른) 디아테사론(Diatessaron)을 만들었다.
 
이 네 복음서의 종합판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타티아누스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250년 동안 낱권의 복음서들을 실제로 전혀 사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도서신들, 특히 바울의 서신들은 공관복음서 다음의 권위를 누렸다.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주요부분은 AD 90년 이전에 서간집의 형태로 회람되었다.

초기의 이단운동
영지주의는 150년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점차 그 정도가 약화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의 악과 하느님 사이에는 전면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구원이란 무능하고도 악한 세력들에서 파생된 피조세계의 혼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즉 선택받은 사람들이 소외된 수인(囚人)들처럼 살아가는 이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원의 방법은 선택받은 사람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영혼이 지복(至福)의 본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가로막는 적대적인 세력들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터득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는 하느님이 역사에 나타났다는 개념을 파괴하였다. 영지주의의 염세주의와 이원론(물질은 악한 것, 정신은 선한 것으로 생각)은 도덕적인 일관성없이 금욕주의와 자유방임주의 경향을 둘 다 가지고 있었다. 영지주의는 반이성적(反理性的)인 종교사상으로서 완전히 초월적인 계시만을 주장하여 창조된 세계 안에 자연적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게 하였으며, 개인의 책임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정통파 신학자들과 3세기의 이교(異敎)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영지주의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짓되고 위험한 미신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배척하였다.

정통신앙은 사도들에게 근거를 둔 교회들이 확인해준 전승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단자들은 이 주장에 맞서 열광적인 예언에 호소함으로써 훨씬 더 위험한 대응을 하였다. AD 172년경 몬타누스와 2명의 여성 예언자들이 프리기아에서 일어난 준 오순절 (準五旬節)운동을 이끌었다. 이들은 세계종말의 임박성을 거듭 주장하였고, 몬타누스는 성부의 시대(구약시대), 성자의 시대(신약시대), 예언자 몬타누스가 예고하는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가르쳤다. 몬타누스주의로 개종한 중요한 인물은 카르타고의 라틴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이다. [신약성서]를 보완해야 한다는 몬타누스파의 주장은 전교회적으로 거부되었다.

신학논쟁
251년 로마의 노바티아누스 분파는 사변적 신학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교회의 교인 자격과 성례전의 유효성에 관한 법적 문제에 집중하였다. 이 문제들은 로마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그 핵심은 도나투스가 표방한 사상들에 관한 카르타고 논쟁이었다(313). 도나투스파는 성례전의 유효성이 목회자의 자격에 달려 있다고 말했으나, 로마 그리스도교인들과 로마와 유대관계에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성례전의 유효성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설령 효력은 없을지라도 분파주의자가 집전한 세례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포의 주교(396~430)이며 위대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나 마침내 합리적인 논거를 포기하고 마지못해 제한된 강제력 사용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교회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은 훨씬 더 착잡한 문제였다. 그것은 신앙이 하느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의 수사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파기하고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였다고 항변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는 모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적절치 못한 비인격적인 사유범주들을 적용하였다. 교회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극단적인 주장들 가운데 일부(특히 예정론과 원죄의 유전론)도 흔쾌히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부에서는 4세기 내내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250경~336)가 내세운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 고난을 당하고 죽은 그리스도가 모든 고통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창조의 제1원인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아리우스의 사상을 정죄하고 하느님의 아들은 그 본질에서 성부와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공식주장은 로고스가 독립된 인격적 실체라는 교리를 거부하고 성부 하느님만이 완전한 신성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던 단일신론에 반대할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가 아리우스 사상을 동방에서 완전히 근절시킨 뒤 비로소 해소되었다.

5세기의 그리스도론 논쟁은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360~380 활동)의 교리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350경~428)의 교리 사이에 벌어진 각축에서 비롯되었다. 이 교리들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크 학파를 각각 대표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루스가 이끈 에페소스 공의회(431)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가르친 안티오크 학파의 극단적인 그리스도론을 정죄하였다.
 
그 이유는 이 그리스도론이 인간 예수를 신의 말씀과 별도로 존재하는 독립된 인격이라고 주장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하느님을 잉태한 자')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키릴루스는 "성육신(成肉身)된 말씀의 단일 본성"을 공식주장했다. 교황 레오 1세(440~461 재위)는 이 단성론(單性論)을 칼케돈 공의회(451)에서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 안에 두 본성(hypostasis)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칼케돈 공의회는 에이트와 시리아의 단성론자들을 소외시켰다.

그후 250년 동안 비잔틴의 황제들과 대주교들은 단성론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크나큰 노력을 기울였으나 연속해서 이루어진 3번의 화해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① 제노 황제 시대(482)의 통일공식주장(Henotikon)은 칼케돈 공의회에 대한 단성론자들의 비판이 정당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 교회를 공격하였다. ②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키릴루스의 신학과 단성론을 비판하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레, 테오도렛, 이바스의 글이 실린 '세 장들'(Three Chapters)을 정죄함으로써 칼케돈 규정을 억지로 옹호하였다. 시리아 교회의 단성론자 야콥 바라데우스는 이에 대항하여 경쟁적인 단성론자들의 주교회의를 창설하고 항구적인 분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③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시대에 칼케돈파는 단성론자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는 2가지 본성과 단일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단의론(單意論)으로 재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회합은 단성론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과도 화해를 이루지 못했으며 칼케돈파 자체의 분열만 일으켰을 뿐이다. 칼케돈의 '양성론'은 지금까지도 줄곧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콥틱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의 안티오크 대주교 관구(시리아 야코부스파)에 의해 거부되고 있다.

교회와 제국의 동맹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312) 동서 로마 전체를 지배하는 황제가 되었고(324), 니케아 공의회의 실제 주관자였으며(325),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창건하고(330), 337년에 사망하였다. 4세기에 그는 특히 종교부문의 위대한 혁명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의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로마가 되리라 생각하며 콘스탄티노플을 그리스도교 도시로 창건한 것은 장래의 정치구조와 교회구조에 영향을 끼쳤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은둔상태로부터 세상으로 끌어내어 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그리스도교가 이교사회를 자기 수중으로 끌어들이도록 도왔다. 교회와 황제의 동맹은 2가지 측면에서 저항을 불러일으켜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서는 수사들의 사막은둔으로 표출되었고, 이교도들은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짧은 통치기간(361~363)을 제외하면 수동적인 저항을 했을 뿐이다.
 
4세기에 고조되었던 이교에 대한 무언의 압력은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 재위)의 칙령들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한 시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만들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많은 이교 사원들이 폐쇄되거나 파괴되었다(예를 들면,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움).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 재위) 시대까지는 이교도들이 대체로 정부로부터 별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다.
교회와 국가의 결속은 주교들에게 수여된 작위와 훈장을 통해 표현되었다. 주교들은 또한 황제의 사절 임무를 맡기 시작하였다.
 
40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궁정에서 모든 문관들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74~397 재임)의 기록에서는 '로마'와 '그리스도교'라는 낱말이 거의 동의어로 쓰여졌다. 아리우스 논쟁(아리우스의 사상에는 예수의 신성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어 있었음)은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아리우스 사상을 지지하자 교회와 국가의 갈등으로 발전하였다. 암브로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압력을 가하여 황제를 교회에 굴복하게 만들었다. 황제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교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파 황제들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들은 교회와 국가가 사실상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등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회는 아주 천천히 제국의 국경선 너머로 선교사업을 펼쳐나갔다. 고트족의 울필라스는 고트족을 아리우스 사상으로 개종시켰고(340경~350), 성서를 번역하였다. 그는 [구약성서]의 호전적인 구절들을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삭제하였다. 고트족은 그들이 믿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반달족 같은 게르만 부족들에게 전했다(최초로 그리스도교도가 된 부족은 프랑크족이다. 프랑크족은 506년경에, 그 뒤를 이어 비시고트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5세기에 서방지역은 야만적인 고트족·반달족·훈족의 침략을 받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으나, 이로 인해 교회나 국가에 별다른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다. 서방에서는 교황의 지위가 국가권력의 쇠퇴로 인해 높아졌다.

726년 이후로 비잔티움은 성상파괴논쟁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 논쟁은 성상들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뜻에 교회가 예속되는 것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이기도 하였다. 성상들에 대한 제국의 공격은 서방교회에서 신랄하게 비판되었다. 그런데 그리스의 성상파괴론자들이 제7차 니케아 공의회(787)에서 정죄당하자, 교황 아드리아누스 1세(772~795 재위)의 마지못한 동의를 받아내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교회회의(794)에 모인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왕의 주교들은 이 결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동방교회에서 성상파괴론이 득세하자(815~843) 서방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났다. 마침내 서방교회는 제7차 공의회의 결정사항들을 받아들였다. 서방교회는 성상들을 동방교회와 다르게 평가하였다. 서방교회에서는 거룩한 그림들이 동방교회에서처럼 성례전적 구원의 실제적인 매체가 아니라 헌신의 보조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황제들과 교황들 사이의 적대관계는 8세기의 교황들로 하여금 보호자를 찾도록 만들었다. 카를 마르텔(719~741 재위)과 프랑크 왕국의 번영은 바로 이러한 보호자를 제공해주었다.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서방교회의 이해관계를 지켜주었고,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은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이 샤를마뉴를 제1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거행해줌으로써 그 절정에 달했다. 신성로마 제국은 1806년까지 지속되었다. 샤를마뉴는 서방 교회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동서 교회의 분열
성상파괴논쟁은 종식(843) 되었지만, 파벌을 유산으로 남겼다. 847~877년까지 자신의 직위를 빼앗기기도 하고 되찾기도 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로 활동했던 이그나티우스는 858년 당국에 의해 추방당했고 포티우스가 그를 대신하였다. 평신도 학자로 제국 법원의 수장이던 포티우스는 대주교로 선출되어 6일 동안 대주교 자리에 있었다. 이그나티우스의 지지자들이 교황 니콜라우스 1세(858~867 재위)를 설득하여 포티우스를 인정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는 불가르족에 대한 비잔틴 교회의 선교에 대해 격노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불가르족이 자신의 선교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우스가 불가르족에 서신을 보내 그리스 의식들에 공격을 가하라고 명하자, 포티우스는 서방교회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Filioque)고 말함으로써 신조를 이단적으로 변조하였다고 고소하였다.

포티우스로 인한 분열의 주요내용은 로마가 교황 니콜라우스와 아드리아누스의 주장대로 모든 교회들에 대한 전제군주적인 관할권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포티우스와 그리스인들의 생각대로 로마가 5개의 준독립적(準獨立的)인 대주교 관구들의 맏형에 불과하므로 교회법에 의거하여 다른 관구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였다.

포티우스 시대에 나타난 상호불신은 교황이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들에게 라틴식 관습을 강요하였던 11세기 중반에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교회들을 폐쇄하였다. 1054년 7월 16일 이탈리아에서 온 한 교황사절은 냉대를 받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를 파문하는 로마 교황의 파문장을 올려놓았다. 또 성령에 대한 그리스식 교리를 정죄하였고, 그리스 사제들의 결혼을 매도하였으며, 성찬을 위해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는 그리스 방식을 비난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이 불화는 양편이 얼마간 격분하여 행동한 데서 비롯된 작은 폭풍으로 취급되었으나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이 점점 더 소원해지자 사람들은 1054년의 사건이 동서의 최후 분열을 일으킨 계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1965년 12월 7일 교황 파울루스 6세와 에큐메니컬 대주교 아데나고라스 1세는 마침내 1054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였다).

중세와 종교개혁
동방교회와의 갈등은 중세기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특색있게 발전하게 한 원인이기도 하고, 그러한 특색있는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73~85)는 안으로부터 교회와 교황권을 개혁하였다. 그는 교황직이 부패와 외부의 공격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을 때 교황직의 교회법적·도덕적 권위를 확립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재임기간(1198~1214) 동안 교황의 보편성 주장은 교회생활의 모든 수준들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두 교황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다른 세속 통치자들로부터 교황권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교회가 봉건주의에 편입되고 세속군주들이 십자군에 참여한 것은 이 주제가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가 시작된 이후 수세기 동안 중세 그리스도교의 산물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것은 중세사상, 특히 스콜라주의 신학과 철학이다. 이 신학과 철학의 탁월한 대표자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였다. 스콜라주의 신학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 전통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고대의 고전적 업적들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했다. 동방과 서방의 초기 교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플라톤적 사유방식의 영향 아래서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 신학들을 스콜라주의에 의거하여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교리내용을 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적 가정들로부터 분리해내야 했다.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재발견을 이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이슬람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먼저 알려졌으며, 결국 비잔티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본 문헌들을 번역하고 연구함으로써 재발견되었다. 스콜라주의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자연정신'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적극적인 태도와 결합시켜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서구문화사 모두의 지표가 된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중세사회와 문화의 그리스도교화를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고, 중세사회와 문화에 그리스도교가 야합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일 수도 있다.

스콜라주의와 중세교회 자체에 대한 후기의 해석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고취시켰다. 프로테스탄트는 서구 가톨릭주의의 교회법적·신학적·성례전적 발전에 대하여 철저히 논박했다는 점에서, 중세 후기에 나타난 다양한 저항운동들과 구별된다. 처음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교리와 생활을 안으로부터 개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으나 이와 같은 개혁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비타협성과 개신교 운동들의 배타성 때문이기도 했고, 정치적·문화적 상황 때문이기도 했고, 이 모든 요인들이 합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을 중세신학과 경건성, 교회조직에 대한 저항의 정도에 따라 몇몇 파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마르틴 루터와 그의 운동 및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 전통을 다룰 때 전반적으로 극히 보수적이었다.
 
장 칼뱅과 그의 추종자들은 덜 보수적이었다. 재세례파와 종교개혁 좌파의 다른 집단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가장 적었다. 이들은 서로 큰 차이점들이 있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개혁운동들은 교회나 교회전통과 구별되는 성서를 종교의 권위로서 강조한다는 점, 죄사함과 관련하여 자유로운 은총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점,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는 전제조건으로 업적을 전혀 도외시하고 믿음만을 강조한다는 점, 평신도가 교회의 활동과 예배에서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 공통의 특징이다.

종교개혁은 콘스탄티누스 이래 번영을 누렸던 기성 그리스도교 내부의 운동으로 출발했다. 종교개혁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1,000년 이상 발전해온 그리스도교 문화의 해체를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완료되었을 때 교회와 문화는 철저하게 변형되었다. 이와 같은 변형은 부분적으로 종교개혁의 결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원인이기도 했다.
 
지리상의 대발견, 자본주의 경제의 태동, 과학시대의 동틈, 르네상스의 문화 등 이 모든 요인들과 그밖의 다른 요인들이 '중세적 종합'을 붕괴시키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 요인들 가운데 종교개혁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확실하게 가장 의미있는 요인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종교개혁의 사실상의 결과는 그리스도교의 분열과 서구의 세속화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못지않게 로마 가톨릭주의도 이 결과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자신의 역사적 형태를 맞추려고 노력하며 근대세계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다. 4세기 이래 서방에서 발전해온 기성 그리스도교가 종교개혁 이후 모든 곳에서 일시에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마침내 그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근대 그리스도교
역설적이게도 낡은 의미의 '기성 그리스도교'의 종언은 교회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광범위한 팽창을 낳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그리스도교화와 아시아·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의 복음화는 '에큐메니컬'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용어에 처음으로 지리적 실체를 부여했다. 그러나 지리적 범위와 교인수의 증가가 반드시 교회의 영향력 강화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의 전기간에 걸쳐 교회는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는 여러 전선들에서 후퇴했고, 정치적으로나 지적으로 많은 특권과 권위를 상실했다.

근대 서구 역사가 형성되던 시기, 대략 16세기초부터 18세기 중엽까지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문화적·정치적 팽창운동들에 가담했다. 신세계의 탐험가들을 바로 뒤따른 사람들은 선교사들이었다. 탐험가가 동시에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개신교와 가톨릭 성직자들은 그당시 정치·문학·과학 부문에서 탁월한 인물들이었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특히 17~18세기의 많은 지식인들을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했지만,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전통적인 형식과 결별했어도 예수라는 인물이나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보통 신실성을 유지했다.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적 편협성의 위험을 보여주는 예로 종교개혁의 신학적 갈등과 그 갈등에 따른 정치적 갈등을 말하면서, 점차적으로 국교폐지, 관용, 종교의 자유를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에 도입했다. 이 운동을 통해 그들은 교리의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개개인의 그리스도교인들과 그리스도교인 집단들과 연합하게 되었다.

17~18세기의 교회에서 나타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의 모습은 그당시의 정신을 반영하거나 저항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로마 가톨릭교 안의 개혁 움직임 일부를 흡수했지만, 교회의 신학과 도덕은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을 통해 크게 수정되었다. 교황은 국가 단위의 가톨릭 교회를 건립하려는 여러 국가들의 시도를 분쇄하는 한편 종교개혁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고 그때 저지른 실수들을 피하기 위해 애썼다.
 
반대로 개신교는 로마로부터 분립했다고 해서 개신교가 비난해 마지않았던 로마 가톨릭교의 많은 경향들로부터 반드시 면역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7세기에 루터교와 개혁교회에서 발전된 정통주의 교의학은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스콜라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스콜라주의의 많은 특징들을 보여준다. 선행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정통주의를 부분적으로 보완하고자 한 경건주의는 개신교 신자들에게 신앙과 그 목적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설교했다. 그러나 경건주의의 설교가 타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경건주의가 강조한 주관성은 뜻밖에도 그 적들의 수중에서 놀아났다. 경건주의적 주관성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흔들어놓도록 도왔던 것이다.

계몽주의 정신과 손잡고 진행된 18~20세기의 혁명들은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밑바닥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촉진시켰다. 과거에 유럽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의 로마 가톨릭교는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적들에 의해 구체제의 일부로 규정되었고, 구체제와 더불어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과학의 발견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 발견들은 이제까지 소중하게 여겨져왔고, 조직화된 그리스도교의 여러 지도자들이 열렬하게 지지하는 창조교리에 관한 옛 개념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근대 학문의 비판적 방법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을 자주 공격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요문서들, 곧 성서와 교부 문서들, 종교개혁자들의 저작들이 활발히 편찬되도록 했다. 또 교회의 역사에 대해 전례없는 관심을 갖게 했다. 19세기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선교의 역사에서 위대한 세기로 일컬어져왔다. 교회에 대한 비판자들이 그리스도교를 공격한 덕분에 교회 안에서 새로운 신앙의 변증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변증가들은 근대의 새로운 철학 및 과학과 연결시켜 신앙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20세기에는 그리스도교의 대의에 대한 또다른 도전들이 공산주의, 새롭게 부흥하는 세계종교들, 무관심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들은 재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교회 내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나타나기도 했다. 에큐메니컬 운동은 개신교와 영국성공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마침내 동방정교회의 일부를 포함하게 되었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 이래로 로마 가톨릭의 주목을 받고 공감을 얻게 되었다.

6) 이슬람 (출처 : 야후 백과사전http://yahoo.co.kr)

피상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슬람교도(무슬림, 모슬람)는 흔히 테러리스트이다. 이것은 미국의 문화적 지배로 인한 것인데 대표적인 것들이 영화일 것이다. 항상 악당이나 테러리스트로 나오는 이슬람교도...
그러나 이슬람의 교리가 사랑과 선행 등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미국식의 주장은 사라질 것이다.

7세기 초 마호메트가 아라비아반도 메카에서 유일신 알라의 예언자로서 세운 종교. 유대교·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일신교(一神敎)이다. 한국에서는 마호메트교·회교(回敎), 중국에서는 청진교(淸眞敎)·후이후이교〔回回敎〕라고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성전(聖典)인 코란에 <나(알라)는 이슬람을 너희를 위한 종교로 승인했다(표준이집트판, 5:3)>라고 나와 있다.
 
원래 아라비아어의 <이슬람>이란 <신의 의지나 명령에 절대귀의(絶對歸依)·복종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 뒤 이러한 귀의 방법을 제도화한 문화적·사회적 복합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또한 이슬람교도를 나타내는 <무슬림>도 원래는 <귀의한 자>를 의미했다. 이슬람교는 불교·그리스도교에 비길 만한 세계종교이다. 성지 메카를 중심으로 아시아·아프리카·유럽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오늘날 세계 무슬림의 총수는 약 6억 3000만으로 추정된다.

기원과 배경 : 자힐리야시대
자힐리야란 이슬람성립 이전의 <무지(無知)>의 시대, 또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남아라비아의 여러 왕국과 그 밖에 북아라비아의 나바테아왕국(그리스어로 나바타이오이왕국)·팔미라왕국의 시대를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슬람성립 전의 1세기 정도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아랍부족들 사이의 투쟁시대로서 자기 부족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부족만이 인간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부족만이 모든 것이었다. 이 시대에 후세의 모범이 된 시(詩)가 탄생했으며 시인이 활동했다. 카힌이라고 하는 샤먼이 사람들에게 신탁(神託)을 전하는 한편, 사막에서는 <진(Jinn;靈鬼)>이 사람에게 해를 가한다고 두려워하며 자연석이나 신의 모습을 새긴 돌을 성석(聖石)과 신상(神像)으로 숭배했다. 그 가운데 신의 저택인 메카의 카바신전의 검은 돌은 사각형의 칸막이가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으나, 신전(神殿) 안팎에는 많은 신상이 안치되어 메카의 쿠라이시족뿐만 아니라 헤자즈의 전지역에서 숭배했으며, 신성월(神聖月)에는 싸움을 중지하고 이곳으로 순례하러 왔다.
 
이때는 시장(市場)이 서고, 시인들이 모여서 재능을 겨루었다. 신 가운데 특히 알라트·우자·마나트의 세 여신이 유명했으며, 알라도 최고신으로 쿠라이시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당시 아랍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였으며, 애니미즘적 성격을 강하게 띤 원초적인 것이었다. 아랍에 유대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70년 예루살렘신전이 파괴된 이후이다. 홍해 연안의 통상로(通商路)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유대교도는 대부분 야스리브(후에 메디나)와 예멘 등에 정착하고 있었다.
 
북부 변경지방에는 그리스도교의 한 파인 단성론파(單性論派)와 네스토리우스파가 침투하고 있었고, 헤자즈지방이나 남부의 나지란시에는 다수의 그리스도교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아랍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다신교나 유대교·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부족의 현세적 번영에 이바지하는 덕(德)과 가치, 즉 <무루아(남자다움)>라는 것이었으며 또한 <다흐르(時)>라고 표현하는 운명관이었다. 당시 메카는 상업도시로 번영하고 있었으나, 그 뒤에는 빈곤과 악폐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에 쿠라이시족의 한사람으로서 마호메트가 태어났다. 전승에 의하면, 남아라비아의 힘야르왕국을 멸망시킨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의 장군 아브라하가 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메카를 공격한 <코끼리의 해>, 즉 570년이 마호메트가 태어난 해라고 한다.

마호메트의 출현
마호메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손에서 양육되었다. 25살 때 부유한 과부 하디자와 결혼하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상업을 하는 한편, 메카의 히라산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을 했다. 610년, 40살 무렵 최초의 계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유일신 알라의 계시인지를 믿을 수 없어 고뇌하지만, 곧 예언자임을 자각(自覺)하여 설교를 시작했다. 천지의 종말이 임박했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중지하고 알라에게 귀의하여, 다툼과 부정을 그만두고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도우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메카사람들은 마호메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와 소수의 신도들을 박해하여, 622년 마호메트는 신도들과 함께 메카를 버리고 포교의 활로(活路)를 찾아 야스리브로 옮겨갔다. 이것을 헤지라(Hegira;聖遷)라고 한다. 메디나에서 마호메트는 대다수의 메디나주민과 메카에서 이주한 신도들의 지지를 얻어, 이슬람 신앙을 실천하는 독자적 공동체인 움마를 만들었다. 6
 
30년에는 종교지도자·정치가로서 메디나에 살던 유대교도를 몰아내고 주변의 아랍 여러 부족들을 교화하여 메카를 정복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을 때에는 아라비아반도의 거의 전지역이 이슬람교로 통일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호메트는 예언자로서 신의 계시를 전하고, 신의 계시를 성전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정치지도자로서 그 가르침을 공동체 안에 심는 데 성공했다.

교의와 실천
이슬람교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마호메트가 나타나기까지의 전사(前史)로 보고 있으며, 이슬람의 교리 및 실천 속에는 유대교·그리스도교와 공통된 내용이 많다. 교리 및 실천의 기본은 <육신(六信)과 오주(五柱;五行)>로 되어 있다. <육신>은 신·천사·성전·예언자·내세(來世)·예정(豫定) 등 6가지의 신앙개조(信仰箇條)를 말하며, <오주>란 신앙고백·예배·자카트(喜捨)·단식·순례 등 5가지의 주요 의무를 가리킨다.

<육신>
⑴ 신(알라):코란에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너희의 신은 유일하신 신(2:163)>이라고 하는 엄격한 일신교의 원리이다. 알라신은 절대 유일하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며,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의 창조자이며 지배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신의 의지와 능력에 의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신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신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42:11)>는 뜻이다. 이것은 신이 동반자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본질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며, 피조물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초월신(超越神)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과 피조물과의 격절성(隔絶性)이 강조되는 한편, 신은 또한 <각 사람의 목에 있는 혈관보다 가까이(50:16)>에 있으며, 인간의 말로 자신을 말하고, 인간처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노하기도 하고, 다시 생각하기도 하는 인격신이다. 신은 또한 악인을 벌하고, 믿음을 갖고 올바른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선한 보답을 하는 의로운 신이다. 또 한편으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17:25)> 자비의 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신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이 신의 유일성(타우히드)에 대한 문제, 즉 신의 초월성·내재성·인격성을 신의 본질·속성과 관련시켜 어떻게 통일적으로 이해하는가의 문제는 뒤에 신학적 논의의 최대 주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 코란과 하디스(예언자의 언행에 대한 전승)에 있는 신의 의인적(擬人的) 표현을 긍정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입장(하슈위파 등)과, 그러한 표현을 모두 비유라고 해석하고 피조물과 공통된 속성을 모두 부정하는 입장(무타질라파·철학자 등)을 양극단으로 본다면, 정통파는 의인적으로 표현되는 신의 속성을 공정하면서 그 신의 속성을 신의 초월성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려 한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

⑵ 천사(말라크):이슬람교는 천사를 신과 인간의 중간적인 초자연적 존재로 인정하고 있다. 천사들은 신의 명령에 따라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예언자 마호메트에게 신의 계시를 전하고 <성령>으로서 예수를 강화시키는 가브리엘, 나팔을 불어 천지의 종말을 고하는 이스라필, 만물의 질서와 생명을 감시하는 미카엘, 죽음을 관장하는 이스라엘의 네 천사 외에, 하늘의 보좌(寶座) 곁에서 항상 신을 찬송하는 천사, 사람의 선악을 기록하는 천사, 지옥을 지키는 천사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신의 명령을 배반하고 인간을 미혹하게 하는 사탄(또는 이블리스), 진이라 하는 영귀, 진 중에서도 특히 힘이 센 이프리트가 있다.

⑶ 예언자(나비) 및 성전(聖典;키타브):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지혜나 이성만으로 절대적인 신 앞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고 또한 내세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캄캄한 밤에 홀로 남겨진 것과 같다. 그리하여 신은 인류의 조상 아담을 창조한 이래 계속 예언자들(사도들)을 각 공동체(움마)에 보내어 올바른 신앙과 행위규범을 전했다.
 
아담을 비롯하여 노아·아브라함·이삭·요셉·모세·다윗·솔로몬·요한·예수 외에, 살리흐·슈아이브 등 28명의 이름이 코란에 올라 있다. 전승에 의하면, 그 총수가 약 12만 4000명이라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이 예언자들 가운데 마지막 예언자가 마호메트이며, 특히 모세·다윗·예수·마호메트는 신으로부터 각기 천계서(天啓書)로 <율법> <시편> <복음서> 및 <코란>을 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계시 및 성전 내용은, 보편적 일신교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이며, 코란은 앞의 성전들을 확증하고 보정(補正)하는 마지막 성전이다.
 
즉,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코란 이전의 여러 성전들은 왜곡되어 본래의 계시를 올바로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은 마지막으로 마호메트를 보내, 인간이 지켜야 할 신조(信條)와 법(法)을 완전하게 제시해주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전하도륵 했다는 것이다.

⑷ 내세(아히라):천지만물은 과거의 어느 순간 신에 의해 창조된 것처럼 영원하지는 않다. 곧 천지만물의 종말의 때는 온다. 종말은 천변지이(天變地異)로 나타나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기의 계시에는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예언하는 내용이 많다. 모든 것이 멸망한 뒤에, 죽은 자들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 신 앞에서 생전의 신앙과 행위를 심판받는다. 신앙이 깊고 행위가 올바른 사람은 천국에서 평안한 생활을 보내고,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한 자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이런 것들에 관한 코란의 기술(記述)은 구체적이고 사실적(寫實的)이다.

⑸ 예정(카다르):과거·현재·미래에 인간과 세계에 일어나는 일이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늘에 수호(守護)되어 있는 서판(書板, 56:78)>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코란에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최선의 보답을 주신다(53:31)>는 내용과 같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리키는 부분도 많다. 이 자유의지와 예정의 문제는 타우히드의 문제와 함께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은 신학적 논의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결국,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대한 신의 관여를 부정하는 자유의지론(카타리파·무타질라파)은 이단시되고, 인간 자신의 의지적 관여를 일체 부정하는 극단적인 예정설(자브리파)은 배격되었으며,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갖는 윤리적 책임과 조화된 형태의 예정설(아슈아리파·마투리디파)이 정통설로 받아들여졌다. 이 밖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정통신조로 인정하고 있다. ① 코란은 신의 말씀이며 창조되지 않은 것이다. ② 믿는 자는 내세에 최대지복(至福)으로서 신을 보게 된다. ③ 죽은 자는 무덤 속에서 문카르와 나키르 두 천사의 심문을 받는다. ④ 죄로 인하여 신앙이 증감(增減)되지 않는다. ⑤ 큰 죄를 범한 자를 위하여 사도들은 신과 인간을 중재할 수 있다. ⑥ 마호메트는 각성(覺醒)한 상태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천상비행(天上飛行)한다. ⑦ 성자(聖者)의 기적은 진실하다. ⑧ 예언자 다음으로 훌륭한 인간은 초대 정통칼리프인 아부 바크르, 2대 우마르, 3대 오트만, 4대 알리의 순이다. ⑨ 이맘(칼리프)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한다. ⑩ 죄인의 뒤를 따라서 예배해도 그 예배는 유효하다. 11 성자가 예언자의 영역에 도달하거나, 인간이 신의 명령이나 금지가 소용없는 영역에 도달하는 경우는 없다.

<오주>
⑴ 신앙고백(샤하다):<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그 사도(예언자)이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앙의 길로 들어갈 때 고백하는 말이며, 예배나 그 밖의 경우에 무슬림이 항상 표명하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표현이 코란에는 없지만, 이것은 무슬림이 되는 것과 무슬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표명하는 일이다. 즉, 앞부분에서는 일신교의 원리를, 뒷부분에서는 마호메트가 신의 사도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마호메트를 통해 신이 계시한 말씀(코란)을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⑵ 예배(살라트):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신의 위대함과 영광을 찬양하는 의례적 행위이다. 1일 5회씩(새벽·정오·오후·저녁·밤) 일정한 시각에 일정한 형식을 따라 행한다. 금요일 정오, 단식 직후의 제사(祭祀), 희생제(犧牲祭),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원제(祈願祭) 등을 지낼 때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본다.

⑶ 자카트:희사(喜捨)나 시혜(施惠)를 뜻한다. 사다카가 자발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것인 데 대해, 자카트는 일정량 이상의 재산에 부과되는 종교세(宗敎稅)·구빈세(救貧稅) 라고 할 수 있다. 금전·곡물·가축 등 종류에 따라 과세율이 정해져 있으며 가난한 사람, 나그네, 고아 등 곤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세속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무슬람 여러 나라들은 자카트를 개인의 발의(發意)에 맡기고 있다.

⑷ 단식(사움):이슬람력의 제9월, 즉 라마단월에 행하는 단식을 말한다. 단식하는 사람은 새벽부터 해가 지기까지 일체의 음식을 끊고, 근신(謹身)해야 한다. 병이나 여행으로 단식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달에 똑같은 일수(日數) 만큼 단식을 하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베품으로써 보상(補償)할 수 있다. 단식기간은 인간 최대의 욕망인 식욕을 이기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환기시키는 때라고 한다.

⑸ 순례(하지):이슬람력 제12월, 즉 두알히자월 7∼10일 사이 메카의 카바신전 및 메카 근교의 성역(聖域)을 순례하는 것을 말한다. 육체적 능력과 재산 능력이 있는 무슬림이 일생에 1번은 해야 하는 의무이다. 이상의 오주를 <이바다트>라고 하며, 이것은 신에 대한 인간의 봉사의무를 말한다. 이에 대해 일상생활의 인간관계, 예를 들어 혼인·상속·계약·매매·재판·형벌·성전(聖戰) 등을 규제하는 인간의 의무관계를 <무아말라트>라고 한다.
 
이바다트와 무아말라트가 이슬람법(샤리아)의 내용을 이루고 있으며, 이슬람법학(피크)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이란 이와 같은 생활규범 속에 표시되어 있는 신의 명령에 따라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이다. 이런 뜻에서 이슬람교는 생활에 밀착되어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무슬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일상과 다른 특별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자각적으로 올바르게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슬람은 그것을 추상적인 도덕으로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생활규범까지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삶의 방식 속에 현세의 복지(福祉)와 내세의 구원이 있다. 왜냐하면, 신이 그 말씀 속에 보여준 명령은 이슬람의 정의를 뜻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신에게 순종하며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슬람의 신앙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적 형태를 취하고, 나아가서 국가적 형태를 취하려고 한다.
 
이슬람의 이 실천적 성격은, 최초로 그리고 가장 고도로 발달한 학문이 신학이 아니고 법학이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하고 알기 쉬우며 명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슬림이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어떠한 행동이 신의 뜻에 적합한가>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위규범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제일의 근거인 코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과정에서 코란학과 문법학, 나아가 고시학(古詩學)과 전승학(傳承學)이 생겼고, 이슬람법 해석의 방법론을 밝히는 법리론(法理論) 외에 신학(칼람)이 생겼다.

역사 : 정통칼리프시대
예언자 마호메트는 교우들에게 성전 코란과 공동체 및 무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의 모범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이슬람 공동체는 아랍 여러 부족들의 배교(背敎;리다)로 한때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칼리프)>로 선발된 공동체의 지도자(이맘) 아부 바크르가 다시 통일했다. 2대 칼리프 우마르는 대정복(大征服)을 시작하여, 이슬람 세계를 아라비아반도의 동·서로 확대시켰다. 이 정복을 수행한 세력은 아랍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이슬람전사단이다.
 
그 뒤 3대 칼리프 오트만으로부터 4대 알리로 넘어가자 공동체는 다시 내란 위기에 직면했다. 이것은 알리와 옴미아드가(家)의 무아위야와의 지도권 다툼이었으며, 이에 깊이 관련된 파(派)가 하와리지파였다. 그들은 이슬람공동체의 윤리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과격파이며, 공동체의 급속한 확산에 의한 세속화를 종교적 위기로 보아, 무아위야 및 그와 타협한 알리의 행동을 비난하고, 이 두 파와 싸웠다.
 
661년 알리가 그들에 의해 암살되자 정통칼리프시대는 끝이 났으며, 이후 90년 간 공동체 지도권은 옴미아드가(옴미아드왕조)가 독점했다. 이러한 기존 이슬람체제(나중에 수니파)에 대하여, 공동체 지도권은 예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알리의 후손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시아파 그룹과 옴미아드왕조 체제를 비(非)이슬람적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 하와리지파는 함께 무력저항을 계속했다.

옴미아드왕조시대
반(反)옴미아드왕조 움직임에 대하여 옴미아드왕조는, 신앙은 행위(죄)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무르지아파의 설을 근거로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탄압을 가했다. 이 옴미아드왕조시대에도 이슬람의 정복은 계속되었으나 정복에 의해 즉시 이슬람화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무슬림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이는 피정복민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슬람의 <평화>와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옴미아드왕조 말기 이슬람의 지배영역은 서쪽으로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 북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구(舊)비잔틴제국령 및 에스파냐, 동쪽으로는 사산조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더스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슬람의 영역확대에도 불구하고 옴미아드왕조시대의 공동체는 평온하지 않았다. 정부의 세속적 성격과 아랍을 중시하는 정책이 비(非)아랍무슬림 및 경건한 신도들의 불만과 반발을 낳았으며, 이것이 시아파·하와리지파 등의 운동과 결부되었다.
 
또한 아랍의 부족대립이 이것과 얽혀 반(反)정부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750년 옴미아드왕조는 붕괴되고 정권은 아바스왕조로 넘어갔다. 옴미아드왕조의 지도자들은 이슬람공동체를 확대하고, 그 공동체를 새로운 환경속에서 유지, 발전시켰지만 공동체를 이슬람적인 성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무엇이 이슬람적인가에 대한 기준도 세우지 못했다.

아바스왕조시대
아바스왕조는 국가통일의 원리가 이슬람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때까지 민간 학자들 사이에서 정비되고 있던 이슬람법에서 국가통치의 기초를 구했다. 그리하여 쿠라이시족 출신의 칼리프가 다민족적 공동체를 하나의 법 아래 단일국가로 지배하는 정치형태를 실현했다. 그리고 교역의 발달과 함께 고대오리엔트·헬레니즘·그리스도교 및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이슬람문명을 꽃피웠다.
 
그러나 1세기 뒤 칼리프의 실권은 약해졌으며, 각지에 독립·반(半)독립 왕조들이 나타났다. 특히 10세기 무렵, 이집트에서는 시아파 내 이스마일파의 파티마왕조가 칼리프를 칭했으며,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시아파내 카르마트파가 지배했다. 에스파냐에서는 같은 수니파인 후(後)옴미아드왕조가 칼리프를 칭하면서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와 대립했다. 또한 10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시아파 부와이왕조의 아미르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1세기 중엽, 동방에서 일어난 수니파의 셀주크왕조에 의해 칼리프의 권위는 회복되었으나, 실권은 술탄이 장악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세계의 혼란과 분열을 한층 깊게 한 것은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의 침공이었으며, 1258년에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아바스왕조 칼리프가 멸망했다. 몽골군의 살육과 파괴는 이슬람세계에 타격을 주었으며, 아랍적인 고전이슬람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슬람의 역사는 새로운 담당자에 의해 새롭게 전개되었다.

수피즘과 이슬람세계의 확대
수피즘이란 이슬람신비주의를 뜻한다. 이슬람의 율법주의와 신학적 사변에 의한 신앙의 형식화에 반대하고 행위의 동기, 성전의 내적 의미를 강조하며, 9세기 무렵 발생한 것이다. 수피에게 있어 타우히드(신의 유일성)라고 하는 것이, 다만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신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인간의 의지를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명상 속에서 자아의식을 무(無)로 하고, 자기와 신이라고 하는 이원적(二元的) 대립을 초월한 극한상황에서 자기를 지배하는 신을 실감하는 것(파나)을 뜻한다. 이러한 사람을 성자(聖者;왈리)라고 하며, 수피들은 그 전형(典型)을 예언자 마호메트에게서 찾았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일체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신에게만 사념(思念)을 집중하는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
 
이슬람법은 이와 같은 수행을 의무로 규정짓고 있다. 이리하여 고전이슬람이 성법(聖法)의 준수를 통하여 신과 통교하는 공동체적 이슬람인 것에 비해 수피즘은 각 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접 신과 통교하는 개인형(個人型)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수피즘은 소수 엘리트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곧 수행방법이 정비되고, 신플라톤주의와 인도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이론화되었다. 12∼13세기 사회적 혼란기에는 디크르(오로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생각을 신에게 집중시키는 일)에 의한 수행의 간이화와 신과 인간의 중개자인 성자에 대한 신앙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교단(타리카)의 형태로 이슬람세계 전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14세기 이후 소아시아에서 발칸반도로 세력을 확대한 오스만제국은 16세기 술레이만1세 무렵, 남쪽으로 예멘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주변 아랍 여러 지역들을 정복하여 통일국가를 만들고, 술탄은 칼리프를 칭하여 수니파 이슬람세계의 수호자로 등장했다. 16세기 초 오스만제국의 술탄 셀림 1세가 시리아를 정복했을때, 13세기 초기의 수피사상가 이븐 알아라비의 묘를 건립한 것은 이 왕조의 수피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무렵 페르시아에서는 일한국·티무르왕조를 거쳐 이란민족을 통일하고 12이맘(시아파의 한 파)의 사파비왕조가 일어났다.
 
사파비왕조는 수니파의 오스만제국과 대립하면서 16∼17세기 아바스 1세무렵 정치적·문화적 융성기를 맞이했다. 수니파 이슬람세계에서 이븐 루슈드 이후 소멸했던 그리스철학의 전통은, 수피즘과 융합한 페르시아의 시아사상 속에서 살아 있었고, 몰라 사드라를 정점으로 하는 사상가들 속에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인도대륙에 이슬람문화가 발전한 것은 13세기 이후부터이다. 즉, 인더스강 상류의북서변경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가즈니왕조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고르왕조 이후, 무슬림의 본격적인 인도침입이 개시되었다.
 
1206년에는 고르왕조에 이어 델리술탄왕조(노예왕조)가 성립되었지만, 1526년 무굴제국이 등장하여 무슬림의 전(全)인도적 지배를 확립하고, 이슬람화를 한층 더 진행시켰다. 무굴제국은 16세기 후반 악바르대제 때 최성기(最盛期)를 맞이했다. 이슬람이 동남아시아·중국·아프리카 등으로 전파되어 간 것도 이 무렵이다. 이로 인해 아랍무슬림이 활동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자 이슬람은 몽골인 정복자들을 개종시켰다.
 
그리고 터키인·이란인·인도인·말레이인·인도네시아인·중국인·아프리카인 속에서 존경받는 무슬림을 찾아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 이 발전과 이슬람화에 활력을 준 것은 수피적 이슬람과 수피교단의 성자 및 상인들이었다. 16∼17세기를 정점으로한 발전의 시기가 지나고 이슬람세계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피들은 체험을 중요시한 나머지 지식을 경시했으며, 이성(理性)에 의한 규제를 떠난 수피즘은 주술화되었다. <신에게로의 귀의(타와쿨)>가 적극적인 활동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무위(無爲)·무활동·현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해되었고, 무기력과 침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현상(現狀)과 동향(動向)
침체된 이슬람공동체의 자세에 비판을 가하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18세기에 나타났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인도의 샤 왈리 알라와 아라비아반도의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이다. 샤 왈리 알라는 영국이 인도로 진출할 무렵, 힌두교도와 시크교도의 각성에 자극을 받아 내부개혁을 통해 쇠퇴하는 무굴제국의 부흥을 도모했다. 이것은 중세적 이슬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나(예언자가 보여준 範例)와 수피즘을 순수한 형태로 결합한 이슬람이었으며, 그의 개혁사상은 후세에 전해져 정치적 운동으로 조직화되었다.
 
이에 대해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는, 이슬람공동체의 쇠퇴와 타락은 수피즘적 협잡물이 부가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제거하고, 코란과 수나의 순수한 원시이슬람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네지드에 있는 사우드가문(家門)의 이븐 사우드와 동맹하여 그 주장을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했으며 이로 인해 네지드지방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랍의 투르크인 정부에 대한 반항은 중세이슬람의 근대이슬람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와하브파의 운동은 오스만제국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운동 자체는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성립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와하브파가 가지고 있는 우상파괴적 개혁사상은 무슬림 속에 잠자고 있던 공동체의식을 불러일으켜 공동체현상에 눈을 돌리게 했다. 19세기 후반 이슬람공동체 전체가 서양의 침략 위기에 놓이게 되자 자말 웃딘 아프가니는 다음과 같은 것을 역설했다. ① 세계의 무슬림이 단결해서 <이슬람의 땅>을 방위해야 한다. ② 이슬람 땅을 방위하기 위해서는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을 강화하고 전통적 이슬람의 악폐를 고쳐야 한다. ③ 이렇게 해서 지난날의 통일적 이슬람국가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 ④ 이슬람은 근대문명과 모순되는 종교가 아니라 이성적 종교이다. 자말 웃딘 아프가니가 역설한 이 범(汎)이슬람주의의 꿈은, 제1차세계대전 뒤 1924년, 터키인 케말 파샤가 일으킨 혁명에 의해 칼리프제도가 폐지되면서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자말 웃딘 아프가니의 개혁사상은 내셔널리즘과 작용하여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鄕愁), 호교(護敎), 근대주의적 이슬람해석과 함께 그 뒤의 근대이슬람사상 및 개혁사상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이집트에서 그의 제자 무하마드압두는 전통적인 아즈하르대학을 개혁하고 이슬람법을 재해석하여, 자말 웃딘 아프가니의 사상을 살리려고 했다. 한편, 이와 같은 근대주의적 이슬람에 불만을 품은 민중은, 전통적인 울라마(學者)가 아니라, 원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무슬림 동포단(同胞團) 등의 행동주의를 지지했다.
 
제2차세계대전 뒤 이슬람공동체는 민족국가로 분열되어 각기 정치적 독립을 달성했는데, 나라마다 가지고 있는 이슬람의 모습은 다르다. 그 예로는 정교분리(政敎分離)와 세속화를 단행한 터키, <이슬람공화국>을 이슬람의 근대적 이념의 국가형태로 보는 파키스탄, 전통적 형태를 유지하는 왕제(王制)의 사우디아라비아, 79년 팔레비왕조를 넘어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이란의 이슬람공화국과 리비아를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이슬람공동체가 있다. 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1974년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한 뒤 국가적 차원에서의 이슬람을 부정하고 압도적 다수인 힌두교도와의 공존을 목표로 한 인도무슬림이다.

한국의 이슬람교
최초의 한국이슬람교도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강제이주된 한국인들 중 극소수가 그곳에 정착한 무슬림과 접촉하면서 생겨났다. 광복 후 이들이 귀국하여 국내에 이슬람을 정착시키는 데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본격적인 포교는 6·25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군에 의해 시작되었다. 1955년 9월 한국이슬람협회를 창립했으며 최초의 이맘을 선출했다.
 
 56년 <청진학원(淸眞學院)>을 개설하여 교육사업을 실시했고, 61년에는 문교부에 <한국이슬람교협회>라는 사회단체로 등록했으며, 65년 격월간지 《이슬람의 소리》를 창간하여 세계 267개 무슬림단체에 무료로 배포함으로써 한국이슬람의 국제적 활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66년 군소교단을 통합한 <범협의위원회>를 해체하고 새로이 <한국이슬람교중앙연합회>를 발족했으며, 67년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로 법인등록하고, 70년 서울특별시 용산구(龍山區) 한남동(漢南洞)에 이슬람성원인 모스크를 건립함으로써 한국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수 종교가 공존하고 있고 같은 유일신앙인 기독교의 확산과 이슬람의 종교적 특성 때문에 독자적인 한국이슬람교의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7) 힌두교(Hinduism)
브라만교의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전통적이고 민족적인 제도와 관습을 망라한 인도의 민족종교. 힌두란 본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인 신두(Sindhu;大河의 뜻)의 페르시아 발음으로 인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는 넓은 의미로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를 포함하는 말이 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자이나교를 배제한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실제에 있어 힌두교는 하나의 종교를 넘어서 인도인의 삶 전체를 지배해 온 성스럽고 다양한 사상적 전통들과
행위의 관습들을 총망라한 매우 포괄적인 문화적 전통을 가리킨다.

역사
BC2300∼BC1800년 모헨조다로·하라파를 중심으로 인더스문명이 번영하였는데, BC1500년 무렵 아리아인이 서북인도에 진입해 인더스문명 유적 근처인 펀자브지방에 정착하여 BC1200년 무렵 《리그베다》를 편찬하였다. 그 뒤 BC500년 무렵까지 주요 베다성전(聖典)이 편찬되었으며, 브라만계급을 정점으로 한 브라만교가 전성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BC500년 무렵부터는 사회적 대변동을 배경으로 반(反)브라만교적인 자유사상가가 배출되면서 불교·자이나교가 성립하였다.
 
불교가 종교·사상계의 주류를 이루던 BC2∼AD3세기 무렵 베다문화의 틀이 붕괴되고 브라만교가 토착의 비(非)아리아적 민간신앙·습속 등을 흡수하면서 크게 변모하여 힌두교가 성립하였다. 힌두교는 브라만교를 기반으로 하면서 ① 힌두교의 핵심을 이루는 성전의 성립(기원 전후 이후) ② 종파의 성립(1∼2세기 이후) ③ 강한 바그티(信愛) 사상의 대두(6∼8세기 이후) ④ 탄트리즘 형성(8세기 이후) ⑤ 이슬람 침투(13세기 이후) ⑥ 영국의 지배, 서양문명과의 접촉(18세기 이후)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힌두교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성전
가장 근본적이고도 오래된 성전은 《베다》이다. 힌두교도는 《베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천계성전(天啓聖典)이라 부르며, 이것은 신이 만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닌 성선(聖仙)이 신비적 영감을 감득하고 계시를 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명목적인 일로 모든 힌두교도가 다 함께 절대적으로 존숭해온 것은 아니며, 오늘날 이것을 읽을 수 있는 힌두교도 또한 많지 않다. 천계성전 다음으로 권위를 부여한 문헌들에는 인도의 국민적 2대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일반대중의 힌두교 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성전 《푸라나》, 《마누법전(法典)》을 비롯한 많은 법전 등을 포함한 고전서(古傳書)가 있다. 고전서는 성현의 저작으로 생각되며 대부분은 산스크리트로 씌어졌다.

사상
힌두교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사상·교의가 공존하며, 다른 종교에서 보이는 정통과 이단을 둘러싼 엄격한 대립·항쟁은 별로 없다. 이런 힌두교의 성격상 교의를 총괄적으로 개관하기는 어렵고, 다만 널리 용인된 중심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우주관:우주 창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절대자 브라마(梵天)가 유희(리라)를 위해 우주를 창조하여, 이 현상세계를 브라마의 환력(幻力;마야)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본래는 환영처럼 실재하지 않고 브라만만이 실재한다고 설법할 때가 있다.
 
우주의 중간에 있는 대지는 메루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한 원반으로, 그 중요부분이 바라타바르샤 즉 인도이다. 이 우주는 브라마의 하루 동안 즉 1칼파(劫;지상의 43억 2000만 년) 동안 지속되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 우주는 브라마로 돌아간다. 우주는 1칼파마다 창조와 귀멸(歸滅)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② 업(業)과 윤회:인간은 죽어서 무로 돌아가지 않고 각자의 업에 따라 내세에서 다시 새로운 육체를 얻는다.
 
이처럼 생사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 윤회로서, 현재 각자의 성격·계급·행복·불행 등은 모두 과거에 행한 업의 과보(果報)이다. 업·윤회 사상은 우파니샤드 가운데에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으로 힌두교의 핵심적 교의가 되었지만, 운명론이나 결정론과는 본질을 달리하고 있다. ③ 법(다르마):행위규범으로서, 중심과제는 종성법(種姓法)과 생활기법(生活期法)이다. 종성법은 브라만·왕족·서민·노예의 4계급에 부과된 법이다.
 
생활기법은 학생기·가주기(家住期)·임서기(林棲期)·유행기(遊行期)라는 인생의 4시기에 관해 규정한 규범이다. 종성제도는 카스트제도와 연결된 것으로 오늘날에도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다르마의 실천은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 애정·성애를 추구하는 애욕, 그리고 해탈과 함께 힌두교도 인생의 4대 목적으로 되어 있다. ④ 해탈: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은 업·윤회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았다. 해탈에의 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힌두교 성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다음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행동(카르마)의 길로서, 결과에 대한 이기적 집착심이 없는 의무의 수행은 과보를 낳지 않으며,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둘째, 지식의 길로서, 참다운 자아는 육체나 감관이나 사고 등이 아니라 영원불멸하는 아트만이며, 이것은 브라만과 동일한 직관적 통찰에 이른다.
 
셋째, 박티의 길로서, 인격신(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길이다. 가장 대중적인 길로서 7∼8세기부터 독립된 교파로 발전되었다. 업·윤회·해탈의 문제는 일반 힌두교도뿐 아니라 사상가들에게도 중요한 과제로서, 힌두교의 정점을 형성한 산키아학파 등 6파철학이 성립하여 이론적·체계적으로 해탈과 그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중에서도 우파니샤드에 입각한 베단타학파는 인도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현대 인도 지식인의 대표적 철학이 되었다.

종파와 의례
다신교적 성격을 반영, 다른 종파는 다른 주신(主神)을 중심으로 하는 그룹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종파는 비슈누교와 시바교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그러나 힌두교의 경우 종파라고 해도 막연한 것이며, 조직화된 교단·교회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힌두교 사원은 인도 각지에 무수히 존재하고 있으나 독립적이며 횡적인 조직은 없다. 사회적 조직은 카스트제도가 대용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세 인도에는 이슬람신비주의(수피즘)가 침투해, 16세기 무렵부터는 힌두교에 이슬람교와 융합된 종교개혁의 기운이 생성되었으며 시크교 등이 성립되었다. 1858년 인도가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된 뒤 서양 사상·문물과의 접촉을 계기로 19∼20세기에 힌두교의 르네상스라 하는 큰 변동이 일어나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아침마다 강이나 저수지에서 목욕하고 시바신 등의 신상(神像)에 예배한 뒤 식사를 한다. 의례에는 염주를 사용하고 만트라(神歌)를 부른다. 의례 가운데 개인의 일생을 통해 실행해야 하는 약 40가지에 이르는 삼스카라(통과의례), 특히 탄생제, 남자가 정식으로 힌두사회의 일원이 되는 입문식, 결혼식, 장례식은 중요하다. 힌두교 전통에 의하면 사람들은 각자의 성향과 관심에 따라 자기가 선택한 신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여러 신들을 동시에 섬기는 것에서도 힌두교도들은 아무 갈등이나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8) 자이나교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생소한 이름의 종교가 자이나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나교는 발생이래 한번도 외국을 건너가 본적이 없다. 쉽게 말해 전도질(!)을 안했다는 얘기다. 자인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마하비르는 불교의 창시자인 붓다와 같은 시대,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활동을 했고, 교리적 유사점도 많아서 인도학을 창시했다고 일컫어지는 막스 베버 같은 사람은 붓다와 마하비르를 동일인물로 보기도 했다. 마하비르는 지금의 비하르주의 바이샬리( 불교의 2차 결집지로 불교쪽에서도 성지이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수행생활이라는 것이 엄청 지독한 무소유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옷도 입지 않고 구걸에 필요한 식기조차 휴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결국 이런 12년의 고행끝에 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데, 이후 30여년은 세상에 더 머무르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과 나눴다고 한다. 현재의 자인교에도 교조때와 같은 전통이 남아있어 자인교의 일부종파는 현재까지도 옷을 입지 않는 나체수행으로 유명하다. 여행자들이 자인교의 나체수행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란 흔치 않은 일인데, 때때로 엘로라의 동굴군에 나체수행자들이 나타나 한번쯤 스치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곤 한다. 현재에는 구자라트 주가 자인교의 영향력안에 있다고 평가되는데 이곳의 빨리타나(인도를 알려주마 단락의 UNESCO 세계문화유산 참조), 마운트 아부, 우다이푸르등에 세밀한 자인교 유적들을 남겨놓고 있다.

9) 불교
불교가 마음에 드는 이유는 붓다가 제자들에게 자기자신(붓다)의 말과 존재 자체를 의심하라고 가르친 점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를 교조로 삼고 그가 가르친 교법을 신봉하는 종교. 붓다는 동사어근 Budh(자각하다, 깨닫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자각한 사람,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불(佛)·부도(浮屠) 등과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상 붓다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붓다가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인 불교의 개조(開祖)를 다른 모든 부처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고타마 붓다>라고 이름하였다.
 
고타마란 석가모니의 성(姓)을 말한다. 그리고 석가모니(sakyamuni)는 석가(sakya)라고 하는 부족출신의 성자(聖者, muni)를 의미하며,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석존(釋尊) 또는 세존(世尊)이라고 한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입멸 후 제자들에 의한 불설(佛說) 편찬인 불전결집(佛典結集)과 교단의 조직화를 통해 비로소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설 중 교리와 사건에 관한 부분을 법(法)이라 하고, 출가자들의 행위에 관한 규정과 승가의 운영 및 규율에 관한 부분을 율(律)이라 하는데, 여기서 경(經;stra)·율(律;vinaya) 이장(二藏)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외면상으로는 평온했지만 내면적으로는 보수파와 진보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여 보수적 상좌부(上座部;Sthavirh)와 진보적 대중부(大衆部;Mahsam·ghika)로 분열되었고, 훗날 진보파들과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을 중심으로 대승불교(大乘佛敎) 운동이 일어났다. 역사적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던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에 의해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카니슈카왕대에 이르러 서역제국과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또 다른 경로는 동남아시아 방면으로 전파되었다.
 
전자는 대승불교, 후자는 소승불교라고 한다. 불교의 전파는 문화의 전파를 수반하여, 당시 선진문명이었던 인도와 중국의 문화가 불교와 합치되어 세계 각국으로 유입되었으며, 각국의 개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불교미술에 있어서는 지역적 특성에 따른 다양한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유품으로 남아 있고, 불전문학(佛傳文學)의 내용은 오래전부터 사원이나 탑에 조각과 벽화로서 장식되어 미술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현재 불교는 한국·자유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와 불교왕국인 타이 등 동남아시아 및 티베트·유럽 일부, 심지어 미국 등지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그리스도교·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고 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불교가 지니는 특징을 보면, ①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아함경전(阿含經典) 외에 수많은 대승제경전(大乘諸經典)이 고타마 사후 수백년을 지나면서 출현한 대승제불(大乘諸佛)에 의해 창작되어, 성전의 수가 방대해졌다. ② 붓다와 대승제불 등에 대한 경모·숭배는, 심정에 있어서는 동일하면서도 형식과 내용이 상당히 다르다. ③ <신(神)>을 내세우지 않기에, 깨달음과 구제의 대상으로서 붓다를 무한히 이상화하면서도 창조자·정복자의 성격은 갖지 않는다. 아울러 대승의 불과 그 후보자라고 하는 보살(菩薩)은 수적으로 크게 증대하여 범신론적인 경향을 지닌다. ④ <깨달음>으로서의 지혜(智慧)가 강조되고, 불교도의 구제기원(救濟祈願)이 반영되면서 자비(慈悲)가 강조되었다. ⑤ 관용유화(寬容宥和)가 넘쳐, 일반적으로 광신적 태도는 지니지 않는다. ⑥ 스스로 행하는 것이 중시되는데, 이때 욕망과 집착을 멀리하는 쪽이 <무아(無我)>로서 강조된다. ⑦ 일체를 시간적으로 절단한 <무상(無常)>과 공간적으로 이어놓은 <연기(緣起)> 등이 축이 되어, 얼마 뒤 실체적 사고를 버린 <무아>설과 함께 <공(空)>의 사상을 완성한다. ⑧ 평안이 있고 어지러움이 없는 깨달음을 얻음으로써 해탈(解脫)이 달성되며, 적정(寂靜) 그 자체의 열반(涅槃;nirvna)을 이상으로 한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간적 삶>의 문제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우선되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인도불교
인도불교사를 초기·중기·후기로 나누면, 초기는 고타마 붓다가 불교를 창시한 때부터 그가 입멸(入滅)한 뒤 100여 년(또는 200여 년)까지의 교단분열기이다. 중기는 부파불교(部派佛敎)가 번영하고, 조금 뒤에 대승불교가 일어나서, 초기대승의 시대를 더한 불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4세기 초에 힌두적 색채가 매우 짙은 굽타왕조가 등장하여 불교도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이후를 후기로 보면, 이 시기에는 부파와 중기·후기의 대승이 병행한다. 그러나 7세기 후반을 지나면 밀교(密敎)가 두드러지게 늘어난다. 곧이어 이슬람교의 침입이 시작되고, 1203년 비크라마실라 대사원이 이슬람 군대에 의해 철저하게 소각되었으며, 그 뒤 교단의 쇠퇴와 함께 1600여 년의 전통을 지닌 인도불교는 막을 내렸다.

초기불교
원시불교라고도 한다. BC13세기 무렵, 북서쪽에서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에 의해서 인도문명은 열린다. 신들을 찬양하는 베다에 이어 그 주석문헌(註釋文獻)이 만들어지고, 다시 BC7세기 이후는 갠지스강 일대에 진출하여 우파니샤드문헌이 나타났다. 초기의 옛 우파니샤드에 처음으로 신화를 뺀 철학이 탄생되었는데, 여기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추구하고 개인의 내재적 원리를 탐구한 다음, 양자의 합일을 주장하였다(이 철학은 2∼3세기 이후에 부흥해서 정통 인도철학을 형성하였다). BC7∼BC6세기 무렵에는 농촌의 성장과 함께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고 군소국가가 성립하여 그들의 합병에 의한 16대국이 발전하고 도시도 건설되어 인도사회는 일대 전기(轉機)를 맞았다. 그 중에서 자유롭고 청신한 사상가들이 잇따라 등장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새로운 사상에 몰두하여, 출가해서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사문(沙門;팔리어는 사마나, 산스크리트는 슈라마나, <노력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활동하여, 세상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베다를 신봉하는 브라만교의 권위를 오히려 부정했던 이 새로운 사상 중에는 상당히 과격한 것도 적지 않다. 새로운 사상에 대해, 초기 불전(佛典)은 62종, 자이나교는 363종을 들어 설명하였다. 그 중에도 불전이 전하는 6종이 잘 알려졌으며, 흔히 육사외도(六師外道)라 한다.
 
그것은 도덕부정(道德否定)-쾌락주의·유물론·허무주의·결정론·회의론·금욕-고행주의로 개괄(槪括)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그와 같은 새로운 자유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뒤, 45년 동안 거의 갠지스강 중류 일대를 끊임없이 돌아다녀 80세에 입멸(人滅)하기까지 그 가르침을 계속하였다. 불멸(佛滅) 후 불제자들이 더욱 광범위하게 흩어져서 그 가르침을 퍼뜨렸는데 수백년 동안은 모두 구송(口誦)의 형식으로 전승되었다. 아가마(Agama)는 전승(傳承)을 뜻하는데, 처음에는 마가다어로, 이어서 그것이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중서부 일대의 속어인 팔리어로 옮겨졌고, 현재는 산스크리트로부터 한역(漢譯)된 것과 팔리어 문헌이 전해져 있다.
 
 다만 현재의 형태로 고정된 것은 다음 대인 부파불교의 초기, 즉 불멸 후 약 200년 이상이나 후대이며, 이 여러 문헌에서 붓다의 직접적 가르침을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적어도 여러 자료에 관한 문헌학이 없어서는 안된다. 한역에는 사아함(四阿含;長·中·雜·增―의 각 아함)과 이들 일부분의 이역(異譯)이 있으며, 팔리어로는 장·중·상응(相應)·증지(增支)·소(小)의 5니카야〔五部〕가 있다.
 
위의 최초의 사부(四部)와 한역의 사아함은 각기 다수의 불경으로 되어 있으며, 공통된 것이 많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없다. 팔리어의 소부(小部)는 15개의 텍스트를 포함하고, 그 중에서 《수타니파타(經集)》 《담마파다(法句經)》와 그 밖에 몇 종류 중 시(詩;韻文) 형식의 불경이 초기의 불교를 잘 전하고 있다. 이상의 전체를 <경장(經藏)>이라 하고, 그 밖에 교단의 규율을 기록한 <율장(律藏)>, 좀 늦게 성립된 주석문헌인 <논장(論藏)>이 있고, 합해서 삼장(三藏)이라 하며, 이것이 후대에 더욱 발전, 증가하여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 되었다. 붓다는 <현실은 고(苦)다>라는 탐구에서 출발하여, 그 해결을 찾아서 수행하고, 고로부터의 해탈을 깨달아 불교를 수립했다. 고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그것을 깊이 탐구해 가면 자기의 밖의 것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안에 있는 것이 자기를 배반함을 뜻한다.
 
예컨대, 생(生)·노(老)·병(病)·사(死)로부터의 해방과 같이 자기의 뜻대로 안되는 것을 자기가 바란다는 것에 고의 본질이 있으며 이것은 자기 모순이나 자기 부정이 된다. 이 고(苦)의 탐구를 둘러싼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삼법인(三法印):법인은 불교의 상징이며,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셋을 말하는데, 뒤에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게 되었다.
 
현실은 모두 고에서 출발하고, 특히 죽음을 포함한 인생의 여러 상(相)이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고 유동한다. 그에 대한 일종의 영탄(詠嘆)이 <무상>으로서 파악된다. 물론 자기는 실천의 중심이며 깨달음의 주체이나, 한편 많은 욕망과 번뇌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것들의 밑바닥에 있는 집착(특히 我執)을 버리는 것이 <무아(無我)>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실의 양상을 밝혀서 깨달음이 열리고, 해탈이 완성되었을 때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열반의 적정(寂靜)이 실현된다. ② 사제(四諦):제(諦)는 진리라는 뜻이며,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의 4가지를 말한다.
 
일체는 고라는 진리, 고는 무엇에 의해 생기느냐는 진리, 고의 원인을 알고 그것을 없애는 진리, 고를 없애는 실천에 관한 진리이다. 도제의 내용은 팔정도(八正道), 즉 8가지 바른사상·사고·말·행위·생활·노력·의식집중·정신통일로 이루어진다. ③ 중도(中道):고와 낙, 상(常)과 단(斷), 유와 무, 허무주의와 쾌락주의 같은, 한쪽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쪽의 극단도 적극적으로 버리는 양상을 말하며 이것은 거의 팔정도의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④ 무기(無記):세계의 시작과 종말 등의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물음은 다만 논쟁을 일으킬 뿐으로 실천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며, 우선 비근한 실천을 할 것을 가르친다. ⑤ 법(法):산스크리트의 다르마(dharma) 또는 팔리어의 담마(dhamma)의 역어이며, 일체의 현실존재를 성립시키고 있는 결정·형(形)·가르침·규범 및 그 존재를 말하며, 이 법으로 일체의 존재를 설명하고, 그 밖의 유일절대의 신이나 원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법에서는 색(色;감각적·물질적인 것)·수(受;意識의 感受작용)·상(想;의식의 表象작용)·행(行;잠재적·능동적 작용)·식(識;인식작용)의 오온(五蘊;5가지 積聚)을 설명하고, 또는 눈·코·귀·혀·몸·마음의 육입(六入;감각기관)과, 그에 대응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對象)을 설명한다. ⑥ 십이연기(十二緣起, 十二因緣):원인과 조건을 분석하면서 종합한다는 일종의 논리적 반성 위에 연기설이 세워져 항상 인생의 현실에 관해서 설명한다. 즉 고는 노사(老死)에 의해, 노사는 생(生)에 의한다고 그 생기(生起)의 양상이 탐구되며, 그것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계열을 더듬어가서 애착에 이르며, 나아가서는 근원적인 무지에 상당하는 무명(無明)에 이른다. 이 현실탐구에 의하여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고, 그 완성태(完成態)는 열 두 부분(支)을 헤아리는 십이연기인데, 그 밖에 여러 가지 연기설이 있다.
 
⑦ 심(心):종교의 중심은 각자의 마음에 있다. 또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나타난다. 마음에서 바른 것과 청정(淸淨)을 찾고, 생명의 존중과 평등을 알며, 정진을 서약하고, 원한·분노·집착·탐욕·우둔을 버린다.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1000명이 넘는 제자들은 불(佛寶)을 중심으로, 그 법(法寶)을 실천하는 교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삼가(sam·gha;僧伽로 음사하고 僧이라고 약칭한다. 僧寶)가 되었다. 교단은 크게 나누어 출가한 남성(比丘)과 여성(比丘尼), 재가신자(在家信者)의 남성(優婆塞)과 여성(優婆夷)으로 이루어졌으며, 재가신자는 출가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출가자는 전심하여 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설도했다. 교단은 항상 열려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또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져 있었다.

 
부파불교
붓다의 입멸 후, 교단은 차츰 확대·발전하고, 특히 BC3세기 전반에 인도에 처음으로 출현한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 그리고 그 황금시대를 쌓은 아소카왕의 불교 신앙은 불교의 세력을 전인도에 비약적으로 늘렸다. 교단의 확대와 함께 아소카왕 때보다 조금 앞서서 교단은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인해 분열되어, 각기 상좌부와 대중부라고 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 사이에 대중부가 다시 분열되어 전부 약 20개의 부파가 성립되었다.
 
 뒤에 일어난 대승불교도(大乘佛敎徒)는 이것을 소승이십부라고도 했다. 각 부파는 저마다 구전의 가르침(阿含)을 불경으로 고정시킨 뒤에, 각자의 해석에 따라 그 교리·교의를 조직화, 체계화했다. 이 정밀(精密)한 교의대계(敎義大系)는 아비다르마(abhidharma;阿毘達磨, 또는 阿毘曇)라고 하며, 서양의 신학 특히 스콜라철학과 대등하다. 현재 아비다르마는 남방불교가 전하는 상좌부의 칠론(七論)과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有部)의 한역인 칠론이 전해지며, 그 밖에 소속불명의 한역이 2∼3개 있다. 부파불교는 거의 출가자의 독점에 맡겨져서 그들은 오직 자기의 수행에 정진하고, 교단에 속하는 장원(莊園)에 의존하였다.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데가 많다. 마우리아왕조 붕괴(BC180년 무렵) 이후, 북인도는 200년 이상이나 외래 민족들의 침입으로 사회적 대혼란이 계속되었고, 불교 내부에서는 출가자에게 치우쳤던 부파불교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재가신자를 중심으로 혁신운동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초기불교 당시부터 세워졌던 불탑(stpa) 숭배가 한층 성해지고, 붓다를 찬양하는 문학작품 등도 관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중국·티베트·일본 등의 북방불교는 모두 대승불교가 주류이다. 그것은 일체 집착의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고, 공(空)의 사상을 내세우는 《반야경(般若經)》, 광대한 부처(毘盧遮那佛)의 세계 속에 10가지의 수행단계를 가르치고, 유심(唯心)을 주장하는 《화엄경(華嚴經)》, 재가의 세속생활 속에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유마경(維摩經)》, 피안의 극락세계를 찬미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에게 구제를 바라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일승사상(一乘思想) 으로써 관용과 방편을 제시하고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수립하는 《법화경(法華經)》, 선정(禪定)에 몰입하여 부처를 눈앞에 보려고 하는 각종 <삼매경전(三昧經典)>, 주문을 외워서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비성을 호소하는 <다라니성전(陀羅尼聖典)> 등이 잇따라 등장한다. 그것은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의 약 200∼300년 동안의 일이며, 마침내는 이러한 경전들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나가르주나(Ngrjuna, 龍樹)가 등장한다.

⑴ 불/보살의 확대:부처가 종래의 고타마 붓다 한 부처에서 과거불(7불)·미래불(彌勒佛), 그리고 현재의 다방불(多方佛)로 확대되며, 그중에서도 구제불로서 아미타불·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등이 경모(敬慕)된 외에 절대자의 성격을 강화한 비로자나불·대일여래뷸(大日如來佛) 등이 확립되었다. 보살은 원래 불타가 되기 이전의 단계를 나타냈는데, 많은 부처의 등장과 함께 보살도 확대되어서, 관세음(觀世音;觀音, 觀自在)·문수(文殊)·보현(普賢)·세지(勢至)·지장(地藏) 등의 여러 보살이 세워지고, 최후에는 불도에 힘쓰고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중생 전반으로 넓혀졌다. 이들 대승의 불·보살들은 아함의 고타마 붓다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름없는 새로운 제불에 의해서 앞에 열거한 대승의 방대한 여러 경전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⑵ 이타(利他):부파교단의 폐쇄적·이기적·독선적인 양상을 냉엄하게 비판하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서로 남과 깊이 관계한다고 보아 보시(布施)하는 등 자비를 으뜸으로 한다.
⑶ 공(空)의 사상:공은 부파불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서 제창되었고 일체의 존재를 상관(相關)·상의(相依)·상대(相待)의 이상적인 상태에서 이해하고 그 연관을 어디까지나 확대시킴으로써, 존재는 물론 법 그 자체의 실체(自性)를 빼앗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자유롭고 장애가 없는 세계를 전개한다.

⑷ 바라밀(波羅蜜):본래는 완성을 뜻하나, 이것을 <피안(彼岸)으로 건너간다>고도 해석한다. 보살의 실천을 명확하게 한 것이며, 보시·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선정·지혜(智慧)의 육바라밀설(六波羅蜜說)이 중심이 되고, 여기서도 특히 집착을 배제하는 것이 강조된다. 3세기 이후에도 경전은 잇따라 만들어져, 《승만경》 《열반경(涅槃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능가경(楞伽經)》 등이 있으며, 한편 마이트레야(Maitreya;彌勒), 아상가(Asanga;無着), 바수반두(Vasubandhu;世親)와 같은 논사(論師)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유식설(唯識說)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중심이 된다.
 
유식설은 일체를 우리들의 경험상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순수한 정신작용, 즉 식(識)으로 환원한다. 반대로 말하면 식의 분별작용에 의해 모든 현상과 존재가 나타난다고 한다. 먼저 눈·귀·코·혀·몸·뜻의 6가지 식이 일상적인 식이나, 그 안에는 말나식(末那識)이 있어서 여러 식을 통일하여 자아의 축(軸)이 된다. 그리고 그 근거에 잠재하는 아뢰야식을 세워, 여기에 과거가 집적되고 미래의 가능성이 수용(受容)되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은 여래의 곳간이며, 불성 즉 부처의 소질이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으로 태어나면서 갖추고 있으며, 평소에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중생 누구나가 여래·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5세기 무렵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이 유식설과 여래장사상을 교묘하게 통일시켜 논한 것으로, 최적한 대승불교입문서라고 했다. 그 뒤, 인식론을 포함한 불교논리학이 확립되고 디그나가(Dignga;陳那)·다르마키르티(Dharmakirti;法稱)가 특히 유명하며, 그들은 중국 등에서 <인명(因明)>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0) 유교(儒敎)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孔子)가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였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인 BC 136년에 국교(國敎)가 된 이래 청(淸)나라가 망할 때까지 역대 조정의 지지를 얻으며 정교일치(政敎一致)의 학문으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을 지배해 왔다.

또한 한자문화권인 한국·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도 전해져서 큰 영향을 주었다.
유학(儒學)과 유교는 서로 비슷한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유교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고
학파를 의미하는 유가(儒家)나 학문을 의미하는 유학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교'는 300년 무렵부터 쓰기 시작한 듯하며 후세에 이르기까지 주로 유/불/도 3교를 병칭할 경우에 사용되었다.
유가/유학에 대해서 유교라는 말은 교화적인 면을 중시하여 약간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본래가 사대부(통치자 계급/지식인)의 학(學)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가·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특색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이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이다. 그러나 그 수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과 동시에 치인(治人)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국민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의 학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는 법률이나 형벌로 백성을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교리와 언행을 통해 백성을 선도하는 것이며, 따라서 먼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필수가 된 것이다.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는데, 군자는 치자(治者)를 뜻하기도 하였다. 그 반대는 <소인(小人)>인데, 피치자(被治者)인 소인에게는 스스로 수양하는 능력이 없고, 치자(군자)의 교화를 받아야 비로소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최고의 지덕을 갖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제왕(帝王)으로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어 성인이 곧 왕자(王者)라고 하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왕(聖王)>이라는 개념이 성립된다. 최고의 성인인 제왕(성왕)을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는 각기 쌓아올린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제왕을 보익(輔翼)하고, 제왕이 도덕정치(德治)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이상이었다. 여기서 윤리와 정치의 일체화를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윤리설(倫理說)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인은 사람을 대할 때의 마음가짐을 말하며 넓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사랑에 가깝고 그 실천에는 특히 <충서(忠恕;진심과 배려)>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인은 먼저 부모·형제 등에서부터 점차 다른 사람에게로 미쳐야 하며 <효(孝)>를 다하는 것이 인의 첫째이고, 형제에 대한 <제(悌)>가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인은 이른바 인류애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인이 확대되어 서민대중에게 미치면 그것은 <인정(仁政)>이 되고, 다시 그 인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성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렇듯, 개인적인 심정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이 치정의 원리도 되는 것이다. 인은 원래 사람의 마음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情)으로 흘러서 발로(發露)를 그르칠 우려가 있다. 그것을 억제하여 적절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의(義)>이다.
 
<인의(仁義)>를 병칭하는 것은 맹자(孟子)에게서 시작되었으며, 그 뒤 유교의 덕목(德目)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에 예(禮)·지(智)를 추가해서 <사덕(四德)>이라 부르며 여기에 신(信)을 추가해서 <오상(五常)>이라고 한다. <예>는 원래 예의범절의 형식이고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한 규범·관습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을 배우는 것은 유가에게는 중요한 교과이지만, 내면적으로 예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실행하는 겸허한 심성을 기르는 일이 필요하다. <지>는 일반적으로 <덕>과 대조되는 개념이지만, 유교에서는 이것을 단순한 지식으로 보지 않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파악하는 덕목의 하나로 꼽는다.
 
<신>은 <충신(忠信)>이라고 할 경우 진심을 뜻하는 <충(忠)>이 말로 표현된 것을 뜻하지만, 오상에서 말하는 신은 양자를 합하여 거짓이 없는 마음의 상태와 태도를 말한다. 한편, 신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신명(天地神明)에 서약하는 측면도 있는데, 신과 비슷한 뜻인 <성(誠)>은 이러한 관점에서 하늘의 길이며, 또한 천지간에 가득찬 정기(正氣)로서 형이상적(形而上的)인 원리가 되기도 한다. 유교에는 또한 <오륜(五倫)>이 있다. 오륜은 기본적인 대인관계를 5가지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변천
유교의 역사는 한나라 무제 때 국교화된 것을 중심으로 그 이전인 원시유교와 그 이후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국교화 이후의 유교는 한나라 무제 때부터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 송(宋)나라 초기에서 명(明)나라 말기에 이르는 시기(宋明性理學), 청나라 때(淸朝考證學)로 3분해서 고찰하는 것이 통례이다.

<원시유교>
춘추시대 말기의 난세에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밖으로는 예를 실행하여 잃어버린 질서를 회복하고, 안으로는 인으로써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적·미신적인 하늘의 중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폈다. 이러한 그의 사상에 공명한 인사들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고, 여기서 유교교단(儒敎敎團)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죽은 뒤 문인(門人)들은 각지로 분산되어 교세를 넓혀 나갔는데, 이에 자극을 받아 묵가(墨家)·도가(道家) 등의 제자백가가 등장하였다.
 
유가는 가장 유력한 학파로서 백가에 대항하면서, 또는 그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동안에 나타난 사람이 맹자와 순자(荀子)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통하여 공자의 윤리설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창하여 공자가 말하는 덕치에 대한 구체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자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는 선(善)해질 수 없다고 하여 예(사회적 규범)를 통한 검속(檢束)을 중시했고, 아울러 객관적인 교학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서경(書經)》 《시경(詩經)》을 비롯한 오경(五經)은 순자를 전후한 무렵에 모두 갖추어졌는데, 경서의 학습을 필수로 교학의 지침으로 삼은 것은 순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한당훈고학(전통적 유교)>
유교의 국교화는 BC 136년 오경박사제도(五經博士制度)가 설치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이미 오경의 학습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유교는 늘 선왕(先王)의 도(道)를 찬양하고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왕(武王)을 성왕으로 앙모하고, 공자의 가르침의 연원(淵源)은 이들 성왕에게 있다고 보았으며, 오경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선왕의 도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論語)》보다도 오경을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후의 유교는 난해한 오경을 앞세우고 훈고학(註釋學), 즉 유교 경서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경학(經學)>으로 전개하게 되었다. 국교화한 당초 전한에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이 성행하였는데 이것은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에 입각하여 경문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 한왕조의 출현을 정당화한, 정치색이 짙은 경학이다. 후한에 들어서자 이것과 병행하여 문자가 가진 의미에 유의하는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생겨서 훈고학으로서의 경학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전한·후한 400년간은 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경학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에 들어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외래의 불교가 성행하자 유교는 쇠퇴하였고, 경전의 주석에도 노장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당나라에 들어서자 남북조로 양분되어 있던 경학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대비하여 경의(經義)를 국가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경정의》의 출현으로 경학이 고정되어 유교가 활력을 잃었으며 이록(利祿)을 위한 학으로 전락해갔다. 당시 사상계의 주류를 이룬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철학이었다.

<송명성리학(신유교)>
송나라 때에 들어서면서 유교의 현상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혁신적인 기운이 움텄다. 북송에서 시작되어 남송의 주희(朱熹;朱子)에 의하여 완성된 송학(宋學;朱子學)이 그것인데, 오경을 대신하여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은 <이(理)>이다. 이는 순수지선(純粹至善)이고, 사람은 본성으로서 그 이를 가지지만(性卽理), 동시에 육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인 기(氣)를 섞게 된다.
 
사람은 기에 의해서 가지게 되는 자기의 욕망(欲望;人慾)을 억제하고 본성(本性;天理)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방법으로는 거경(居敬;마음을 純粹專一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과 궁리(窮理;사물에 대하여 理를 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讀書問學)의 양면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처음에 이단시되었으나 뒤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어 융성하게 되었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전통적 유교를 대신하여 국교가 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에 이르자 왕양명(王陽明;王守仁)의 심학(心學)이 관학화(官學化)하여 주자학보다 활기를 띠었다. 심즉리(心卽理)를 밝혀 이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우리 마음이 이(理)라고 하는 철저한 유심주의론(唯心主義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말류(末流)에는 극단으로 치달아서 독서를 멀리하고 경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청조고증학>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는 양명학의 말류를 비판하고 송·명 나라의 신유교를 공소(空疎)하다 하여 배척하고 훈고학으로 복귀하려는 기운이 고조되었다. 송학(宋學)은 여전히 관학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학술의 주류는 한학(漢學)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한 때의 고문경학을 기초로 해서 문자학(文字學)·음운학(音韻學)·역사학·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구사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을 통하여 진리를 구하는 것)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청학의 관심은 점차 전한 때의 금문경학으로 옮겨갔다. 정치색이 강했던 금문경학은 청나라 말기의 동란기를 맞아 여러 종류의 개혁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 등에 의해 제창된 공양학(公羊學)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중국과 유교>
청나라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출현함으로써 성왕(天子)을 정점으로 하는 유교의 정치학은 존재의의를 상실하였고, 그 윤리설 또한 자유평등을 부르짖는 시대사조 앞에서 비판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권력자측에서는 여전히 유교를 온존(溫存)시키려는 동향이 있었고, 또한 효윤리(孝倫理)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도덕은 민중들 사이에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유교비판 풍조는 한층 강해졌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 전개된 74년의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이 가장 격렬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이름이 이러한 정치운동에 이용된다는 것은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비공운동이 지나간 뒤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가 수복(修複)되었고 일부에서는 유교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선에서 머무르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서 얼마만큼이라도 현대적 의의를 찾으려 하는가 하는 것은 이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
한국에 유교사상이 전래된 시기는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BC 3세기 무렵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부터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과정에서 유교사상이 부분적으로 전래되었고, 삼국시대에 이르러 공자의 경학사상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는 대체로 고래(古來)의 모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 유교가 생활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영향이 깊어질수록 다양한 변화를 보이면서 가치관·생활양식·법률제도 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과 인접해 있어 가장 먼저 중국문화와 접촉하여 수용, 발전시켰으며, 백제가 해상을 통해 중국과 교류함으로써 유교 및 여러 문물·사상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그러나 신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재래의 고유한 풍속과 전통을 고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국문화와 유교사상이 전래되어 건국 초기부터 유교가 상당한 규모로 활용되었으며, 노장의 자연사상도 역시 혼입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중기 이후로는 불교가 수입되었고 후기에는 종교로서의 도교를 수입함으로써 유·불·도교가 병립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을 세워 상류계급의 자제를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교과내용은 오경과 삼사(三史), 《문선(文選)》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국가체제와 문물의 정비, 유학의 정치원리에 입각한 통치, 유교경전 학습을 통한 인재의 배출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건국 초부터 역사 기록을 중시하여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을 편찬하였으며, 경전을 통해 왕도정치(王道政治)·덕치주의(德治主義)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였다.
 
이 밖에 예제(禮制)나 생활습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효에 대한 관념은 조상숭배에 더욱 집착하게 하였으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국사(國事)와 종묘를 새로이 세우고 중시하게 되었다. 백제는 중국의 군현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질서를 수립하고 중국문화 수용도 고구려보다 빨랐다. 특히 중국에서 수입한 경학·의학 등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 앞장서서 일본문화의 개창자적 역할을 하였다.
 
유교의 법식은 백제인의 의례와 윤리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제사나 묘제 등에도 유교적인 의식을 적용하기 시작하여 전통적인 신관(神觀)·사생관·윤리의식이 점차 유교화되었다. 한편, 일찍부터 한문(漢文)을 사용하여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신찬(百濟新撰)》 《서기(書記)》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였으며, 4세기 후반부터는 유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하여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대표적인 학자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들 수 있는데, 근초고왕 때 아직기는 일본에 유학을 전하고 일본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근구수왕 때의 왕인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하고 그곳에서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이 밖에 무녕왕 때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고안무(高安茂) 등도 일본에 유학을 전하는 등, 백제는 일본에 학술과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 유교의 전래가 가장 늦었다. 그러나 유교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사회질서와 정치이념에 유효 적절하게 토착화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지증왕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유교의 뜻에 따라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의 뜻을 취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상복법을 제정·공포하고 율령의 반포, 공복을 제정하는 일 등은 모두 넓은 뜻에서 유교사상이 국가현실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교사상과 화랑도(花郞道)와의 관계도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화랑도는 본디 사람들을 모아 선비를 선발할 목적 아래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교육하였으니, 이는 치국의 대요(大要)였다>고 기록하였으며, 《삼국사기》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를 인용하여 <현좌충신(賢佐忠臣)과 양장용졸(良將勇卒)이 화랑도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였다. 이밖에 임신서기석(壬申書記石)에 화랑들이 《시경》 《상서》 《예기》 등을 배울 것을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도 화랑도와 유교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문무왕의 뒤를 이어 위민(爲民)·보민(保民)·안민(安民)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의 유학은 당나라로부터 문화를 도입하여 교육사상을 확립함과 동시에 유학자라고 할 만한 인재를 배출하는 데 특색이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 국학을 세워 교육제도를 완비하였는데, 그 편제나 교과 내용이 모두 유학에 입각한 것이었다. 또한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이는 골품제에 대한 비판·견제로 이루어진 개혁으로서, 과거제의 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강수(强首)·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등이 있다.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 왕건(王建)이 불교를 숭상한 영향을 받아 유교적 정치사상과 이념의 현실적용이란 특성 아래 유교적인 교양이 지식인 사이에 일반화된 상태였지만 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치중하였기 때문에 유학사상이 아직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태조 때는 학교를 창설하여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광종 때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료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숭불(崇佛)의 폐단을 고려,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금하고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정치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최승로(崔承老)와 같은 유신(儒臣)의 활약이 컸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던 초기 단계와는 달리 점차 통경명사(通經明史)에 힘써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심화되었다. 또 정치에 실제적인 적용이 증대한 것 이외에도 한당유학(漢唐儒學)의 내용이 다른 학문이나 사회적인 측면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문종 때 유학자로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리던 최충(崔沖)은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고 구경(九經)과 삼사로써 후진을 가르쳤는데, 뒷날 이를 본받아 유신들이 다투어 사학을 열어 십이공도(十二公徒)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예종·인종 때 발달한 강경제도(講經制度)는, 군주에게는 유학적교양의 배양과 통치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문신들에게는 부화(浮華)의 방지와 국가경륜의 연마 및 군주에게 직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종은 문무칠재(文武七齋)와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는 등 국자감의 부흥에 힘써 유학의 기풍이 날로 높아졌다. 이와 함께 고려 초기 수사사업(修史事業)의 흐름 속에서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을 넘어서는, 유학적인 역사의식과 역사서술의 체계를 갖춘 역사서로 평가된다. 한편, 관학이 부홍하고 강경제도가 발달한 반면, 예종 때부터 문사(文士) 우대의 경향이 극심해져 문벌귀족의 전횡이 노골화되었다.
 
그리하여 의종 때에는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무단정치를 함으로써 유학은 침체기에 접어들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침체된 유학을 부흥시키기 위한 반성적 기풍이 조성되었고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되었다. 안향에 의해 전래된 주자학은 백이정·우탁(禹倬)·권부(權溥) 등에 의한 수용단계를 지나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심화, 정착되었다. 주자학자들은 송대 성리학 벽불론(闢佛論)과 도통론(道統論)에 근거,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정책과 이념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초기 이래 경세론적 특성을 가졌던 유학은 철학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성리학의 수용으로 인해 그 학풍이 일변하고, 시대를 이끌어가는 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조선의 유교입국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1) 도교(道敎)

중국의 3대종교(유교/불교/도교)의 하나. 도학이라고도 한다.
도교는 중국민족의 고유한 생활문화 속에서 생활신조, 종교적 신앙을 기초로 형성된 중국의 대표적인 민족종교이다. 이는 한(漢)시대 이전의 무속신앙과 신선사상, 민중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한대에 황로신앙(黃老信仰)이 가미되어 대체적으로 후한 말부터 육조시대에 걸쳐서 형성되었고, 현재까지도 타이완이나 홍콩 등지에서 신앙되고 있다.

초기의 도교적 신앙은 불로불사의 신선(神仙)을 희구(希求)한다든지 무술이나 도술에 의한 치병(治病)·재해 퇴치 등 현세의 행복추구에 그 중점을 두었으나, 유교나 불교와 경합(競合)하고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내적 수양과 민중적 도덕의식의 견지(堅持)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도 중요시하게끔 발전했다.

도교의 개념
도교란 사상(思想)·교리·기술(技術)·사회·교단(敎團)·신앙대상 및 신앙의례(信仰儀禮) 등 모든 요소를 함유하는 문화복합체이다. 그것은 중국의 역사와 풍토, 지역적 조건 안에서 정치와 사회·문화 등과 관련되면서 전개된 생활문화를 기초로 하여 발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민족 고유의 종교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한 유형으로 발전한 것에 유교가 있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유교가 중국의 사회·국가의 질서, 그리고 학문·기술을 통치자의 입장에서 구명(究明)하고자 한 것과는 달리, 도교는 종교적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의 질서 및 학문·기술을 민중의 입장에서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도교에서는, 유교에서 배격한 미신이나 온갖 도깨비·변괴귀물(變怪鬼物) 등 무축적 귀신신앙(巫祝的鬼神信仰)도 포함한다. 이 도교의 개념은 <민중도교>와 <교회도교>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민중도교는 농민이나 민중 일반의 신앙과 생활신조,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조직된 집단이나 결사를 말한다. 이는 후한 말에 태동하고 있었는데, 특히 송대 이후의 서민사회의 발전에 대응해서 유교나 불교 등과의 합일(合一)하에서 전개된 것이다. 한편, 교회도교는 국가나 왕조에 의하여 공인된 도교의 교단·교파이며, 5세기의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가 그 최초이다. 천사도는 원래 <삼장인 장릉(張陵)·장형(張衡)·장노(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라 불리었으며, 후한 말에 일어난 농민을 주체로 하는 초기의 민중도교였지만, 위(魏)·진(晉)의 정권밑에서 발전한 신오두미도(新五斗米道) 즉 신천사도는 북위(北魏)왕조의 공인(公認)에 의해서 교회도교가 되었다.

각종 도교의 용어
도교의 원뜻은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도(道)>란, 유가(儒家)나 도가(道家)를 비롯하여 중국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설명하는 학설의 중심으로, 중국인의 의식의 기초에 존재하는 것이다. <도교>라는 말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처음에는 <성인(聖人)의 도의 가르침>이란 의미를 가지고 유교를 지칭(指稱)하고 있었다. 또, 불교 전래 뒤로는 불교를 의미했던 시대도 있었다.
 
즉, 이것들은 <선왕(先王)이나 성인의 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인 것으로, 오늘날 일컬어지는 중국의 민족종교로서의 도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이 <성인의 도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과 술(術)을 <도술(道術)>이라고 하였다. <도술>이란, 원래 <성인의 도의 술>, 치세치민(治世治民)을 위한 정치의 술이었다. 한편, 선인(仙人)이 되기 위한 방법, 또는 선인과 교감(交感)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선방술(神仙方術)>, 의료기술로서의 <의방술(醫方術)>, 그 밖에 과학적 기술과 주술 등 여러 가지의 방술이 존재해 있었다.
 
이 도술을 행하는 자가 도사(道士)이고, 방술을 행하는 자가 방사(方士)이다. 도술과 방술의 차이를 굳이 말한다면, 전자가 국가·정치에 관한 경세(經世)·치민(治民)의 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개인적·종교적 성격을 가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후한대로 들어서자 이 양자는 혼동되었다. 따라서 후한대에는 도술의 범위가 매우 넓어져, 정치술이나 과학적 기술에서 주술과 예언·복점(卜占) 등의 종교적 영력(靈力)을 포함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행하는 자는 도술의 사(士), 즉 <도사>라고 불리었다.
 
이 경우의 도사는, 원래의 <성인의 도의 도술>의 사로서의 <도사>라기보다는 종교적 요소를 지닌 <도사>였다. 무의(巫醫)의 주술과 부적을 사용하는 종교집단은 <귀도>라고 불렸다. <태평도>나 삼장의 <오두미도> 등도 귀도를 중요한 요소로 삼은 초기의 도교적 집단이다. 또 귀도에 대하여 <신도>라는 성어(成語)가 다루어졌다.

 
<귀신(鬼神)>의 <귀(鬼)>에 연관되어서 <귀도>가 생겨났고, <신(神)>에 연관되어서 <신도>가 생겨났다. <신도>는 우선 신을 제사지내는 <단(壇)>과 통하는 도를 의미했으나, 점차로 신앙의 객체인 신 그 자체, 또는 신신앙(神信仰)에 기초하는 종교집단과 가르침도 뜻하게 되었다. <도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이지만, 전국시대에는 유가·법가(法家)·묵가(墨家) 및 방기(方技)·신선(神仙) 등과의 교류가 있었고, 진(秦)·전한대를 거쳐서, 후한대에는 <도가>의 개념 안에는 종교적 요소도 섞여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즉, 도가라는 개념은, 오늘날 말하는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사상·철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도가뿐만 아니라, <도술> <방술>까지를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되었다.

도교의 원류(源流)
이상과 같은 도가와 도교의 개념의 변천은 그대로 도교 성립의 전사(前史)와 관계된다. BC 3세기 무렵의 전국시대에 연(燕)·제(齊;河北省·山東省) 지방에는 <방선도(方僊道)>라 불리는 신선방술(神仙方術)을 위주로 하는 종교집단이 존재했다. 일찍이 제나라에는 민간의 무축(주술사)에 의거하는 농작(農作)을 위한 산천제(山川祭)와, 그것을 토대로 하여 왕후(王侯)들이 풍작을 기원하는 팔신(天主·地主·陰主·陽主·月主·日主 등)에게 지내는 팔신제가 있었다. 이 팔신제에 그 당시 이미 발달되어 있었던 경락의경(鍼灸醫療學)이나 본초경방(漢方醫藥學)의 학문과 보인(步引)·안마·복이(服餌)·황야(黃冶;體操·食物·鍊金養生) 등의 신선술(神僊術)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방선도이다.
 
방선도는 신선방사에 의한 종교집단으로, 그들 방사의 말을 믿고서 제나라나 연(燕)나라의 왕후귀족, 또는 진나라의 시황제(始皇帝) 등이 불로불사의 신선약을 얻기 위하여 신선이 산다는 발해만 위의 삼신산(三神山), 즉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에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방사에게 신선의 약, 특히 황금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먹음으로써 불사의 몸이 되려고 하였다. 연금술에 의해 만들어진 황금은 불사의 약 중에서 가장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진시황제는 이들 방사가 설명하는 봉선설(封禪說)에 의해서 팔신 가운데의 지주(地主)라 여겨지는 태산(泰山)과 그 지봉(支峰)인 양부(梁父)에서 천지의 신을 제사지내고, 천신과 교감하여 죽지 않는 몸이 되고자 했다.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위왕(威王)·선왕(宣王) 때가 최성기였으며, 그 도읍인 임치(臨淄)에는 중국 각지에서 여러 학자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중국문화와 학술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제나라의 학자인 추연(鄒衍)은 음양오행설을 제창하여 당시 최고의 학자로 칭송되었다. 방사들은 이 음양오행설을 도입하여 신선설이나 봉선설에 교묘히 이용하였다. 방선도의 발흥은 연·제나라의 해류(海流)에 의한 해상교역과, 명산에서 약초나 황금을 구하는 방기(方技)의 무리들의 활약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며 한반도에서의 신선설의 형성이나 기타의 전설도 이러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신화 속에서 중국의 조물주라 여겨지는 황제(黃帝)는 전국시대부터 방선도나 의방술과 연결되어 신선의 조상으로 여겨졌다. 신선이 된 황제와 도가의 노자가 결합되어서 <황로의 말씀>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전국 말기부터 진대(秦代)·한초에 걸쳐서 <도가><법가> 일체의 정치가 행해졌는데, 도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황로의 말씀>에 기초한 <황로의 술(術)>에 의한 정치였다. 황제와 더불어 노자의 신선화(神仙化), <황로>의 신선적 객체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후한대에 와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예언서를 기초로 하여, 전한 말에는 이미 일어나 있었던 참위설(讖緯說)이 도교적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참위설은 유가의 경(經)의 설을 음양오행설이나 <수술(數術)>계의 다른 학설에 의해서 보완하고, 주로 사회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예언을 그 내용으로 삼는 학설이다.
 
이 참위설에 불교의 영향도 덧붙여져 <황로도(黃老道)>가 일어났다. 불교와 중국문화의 상호 영향의 결과, <황로>는 부도(浮屠;佛陀의 옛 漢譯)와 같은 종류로 생각되어 노자의 신격화(神格化)가 횡행했고 신앙의 객체로서의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성립되었다. 후한 중기로부터 말기에 걸쳐 황로도나 주술을 위주로 하는 무축도(巫祝道;鬼道)가 모태가 되어서 농민·민중의 종교결사인 태평도(太平道)·오두미도가 생겨났다.

도교 각파의 성립
태평도는 후한 중기의 간길(干吉)이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태평청령서(大平淸領書)》, 즉 태평경을 전수받은 일에서 시작된다. 이 경전을 종교운동의 지주로 삼아 허베이〔河北〕의 장각(張角)이 태평도를 조직했다. 그러나 장각이 후에 반란을 일으켜서, 태평도는 멸망하고, 민간에 남은 잔당이 오두미도와 합류했다. 그 오두미도는 장릉(張陵)이 쓰촨〔四川〕의 청두〔成都〕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이다.
 
도가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술적인 치병(治病)을 하고, 그 사례로 쌀 5두(한국의 약 5升)를 헌납케 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병자를 조용한 방에 앉혀 놓고 과거의 죄를 반성케 하되 천(天)·지(地)·수(水)의 신, 즉 천관(天官)·지관(地官)·수관(水官)의 삼관에게 자기의 이름과 과거의 죄과를 써 넣은 서장(書狀) 3통을 바치고 속죄를 위한 공양물이나 노동력을 제공하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죄과로 인해서 질병이 일어난다는 사고방식은 태평도에도 있었다.
 
오두미도가 종교 교단으로서의 조직을 확립한 것은 장릉의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의 시절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특히 장로 때에는 처음에 익주(益州)의 장관의 보호를 받아 흥왕했으나, 후에 압박을 받게 되자 쓰촨 동부에서 산시〔陝西〕의 한중(漢中)에 걸친 땅으로 옮기고,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그 제후가 되고 나서 관동(關柬)의 호족·귀족과 농민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관동의 오두미도는 원시적인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에서 호족·귀족과 관계를 맺고 신선방술과 다른 도술을 위주로 하는 교단으로 변해 갔다. 이 계통의 오두미도는 강남(양쯔강 이남)에까지 퍼져 갔는데, 귀족형의 오두미도 신앙과 동진(東晉) 말기의 손은(孫恩)에게 인솔된 농민·민중형의 종교반란을 야기시켰다. 한편, 화북지방에 유포된 오두미도는 불교와 경합하기도 하고 유교적 질서를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구겸지(寇謙之)의 <신천사도(新天師道)>로 발전했다. 또 장쑤〔江蘇〕·강남의 호족층을 기반으로 하여 후한 말로부터 육조시대에 걸쳐, 신선도(神仙道)에다 제자(諸子)·황로의 사상과 여러 가지의 도술 및 참위사상 등을 복합화한 도술적 종교가 생겨났다.
 
한말의 전란을 피하여 강남으로 갔던 도사 좌자(左慈)에 의하여 정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갈현(葛玄) 일족에게 계승되었던 이 계통의 도술적인 종교는 <갈씨도>라고도 불리었다. 갈현이 종조부인 길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고, 이 계통에서 전해지는 연금술에 의한 신선방술을 집성했다. 또 갈씨 일족에 의하여 뒷날의 《영보경(靈寶經)》의 기본부분이 만들어졌다. 이 경전은 그 뒤 이 계통의 도교 경전류가 되어서 계승되었다. 오(吳)나라 재상의 자손으로 알려진 육수정(陸修靜)은 본래 천사도 계통의 도사였는데, 제국(諸國)을 순례하는 동안 《상청경(上淸經)》을 입수하여 그것을 정리했다. 그는 또 <갈씨도>에도 통하고 있었으므로 초기의 《영보경》도 정리하고, 뒤의 도교 경전의 집대성인 <도장(道藏)>의 분류체계 <삼동설(三洞說)>을 확립했다.
 
육수정의 뒤를 이어 경전을 정비한 사람이 도홍경(陶弘景)인데, 그는 모산(茅山)을 거점으로 《상청경》을 대성하여 이른바 <상청파>를 확립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적인 의경(醫經)·경방(經方)·신선의 학(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기에 다시 불교와의 교류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이론적인 도교 교학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육조말에서 수대(隋代)까지 화베이〔華北〕에 신천사도, 강남지역에는 천사도와 상청파가 각각 전개되어 갔다. 당(唐)대로 들어오자, 상청파의 본거지인 모산을 중심으로 해서 남북 도교의 통합과 교류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도홍경의 교학을 받은 당(唐) 초의 상청파 도사 왕원지(王遠知)는 처음에 신천사도에 수행을 했으며, 제자인 반사정(潘師正)은 모산에서 신천사도의 거점인 쑹산(嵩山〕으로 옮겨 살았다. 이같은 상청파의 활약으로, 모산은 당대 도교의 중심적인 고장으로 되었고, 상청파는 천사도와 함께 도교의 2대 유파로 육성되었다.

도교와 불교의 교류
북위의 태무제(太武帝)는 재상 최호(崔浩)의 권유에 따라서 구겸지의 신천사도를 국교로 삼았으며, 연호도 태평진군(太平眞君)이라고 하였다. 도교를 믿는 한인 호족인 최호는 오랑캐의 가르침인 불교가 왕조의 재정을 좀먹자, 불교를 배제시키고자 태무제에게 권고해서 446년에 불교 탄압을 감행케 했다. 태무제 뒤에 불교는 다시 부흥하였으나,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때에는 다시 탄압당했다. 북주의 무제는 유교적 왕조체제에다가 불(佛)·도(道) 양교를 순응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572년의 법론에서 무제는, 삼교의 순위를 유·도·불로 하였지만, 574년의 도·불의 법론에서는 도사 장빈(張賓)이 불교측에 의해서 논파되었으므로 마침내 불(佛)·도(道) 양교를 함께 폐하고 승과 도사를 환속시켰다. 이어서 <현도관(玄都觀)>을 <통도관(通道觀)>으로 개칭하여 국립종교연구소로 만들었고, 3교의 스승 중 우수한 자를 통도관학사로 삼아 거기에서 불·도 2교의 유교화(儒敎化) 연구를 하게 했다.
 
송대의 진종(眞宗)은 도교 존중정책을 강화하고, 1015년에는 용호산 천사도(天師道)의 제24대 천사 장정수(張正隨)를 불러들여 왕조와 천사도의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이 무렵부터 도관(도교의 사원)을 고급관료가 관리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진종은 재상 왕흠약(王欽若)을 총재로 삼고, 도사들을 동원하여 도장(道藏)을 편찬시켜 《보문통록(寶文統錄)》을 편집하였다. 이어서 1013년에는 도사 장군방(張君房)에게 정비케한 도장 《대송천궁보장(大宋天宮寶藏)》을 완성하게 했다. 장군방은 그 정요(精要)를 뽑아 《운급칠첨》을 저술했다. 송은 국난(國難)을 당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행할 뿐만 아니라, 도교의 힘까지 빌리려고 했다.
 
불교의 중국 전래에 의하여 그때까지의 중국문화 안에서의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대립과 융합에 더하여서 유가·도가 대(對) 불가의 문화마찰이 격심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삼가(三家) 상호간의 경합이나 불가의 유가화(儒家化)로 인해서 유두도불양각형(儒頭道佛兩脚型)의 3교 관계가 생겨나게 되어 유가·도사·사문(沙門)의 삼교겸수(三敎兼修)가 확산되었다.

민중도교의 전개와 신도교
당실(唐室)의 도교신봉책 때문에 교회도교의 교역(敎域)은 확실하게 중국 전토로 퍼져갔다. 당말 이래 각지로 전파된 도교는 그 지역의 습속과 결합하여 삼교합일의 민간신앙(민중적 도교신앙)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송대에 이르러서는, 서민사회의 발전을 배경으로 해서 삼교합일의 새로운 민중도교가 전개되었다.
 
송대의 민중도교의 특색은 유불도 3교의 합일·혼합적 형태를 취하고, 사서(士庶) 모두에게 통용되는 선(도덕)을 실천하였으며, 타인에게도 권장함으로써 생활문화 안에서 민중적 도교신앙을 깊게 하는 경향이 강했다. 민중도교에서는 민중의 주체성이 강한 민중적 도덕 실천을 강조하는 《공과격(功過格)》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민중사회에 밀착된 신도교 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산둥〔山東〕의 유덕인(劉德仁)은 <진대도교(眞大道敎)>를 창시하였는데, 교단의 교법에서는 하늘에 대한 기념(祈念)을 통해서 훈주사음을 금했으며, 충효 등 일상윤리의 견지가 설파되었다. 뒤에 가장 유력한 도교 교단이 된 <전진교(全眞敎)>는 왕중양(王重陽)에 의해서 창시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유불도 삼교동원(儒佛道三敎同源)의 입장을 취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 《효경(孝經)》 《도덕경》 《청정경(淸淨經)》 등을 경전으로 삼아 읽었으며, 부주(符呪) 등의 술을 물리치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신선설에 의하지 않는, 오직 내외 양면의 수행(自利利他의 眞功과 眞行의 실천)을 주장했다.
 
또 서민의 도덕의식의 고양(高揚)에 의해서, 일상 윤리의 실천이 종교화된 것으로 선서(善書)가 있다. 이는 권선(勸善)의 서(선행을 권고하는 책)이며, 서민적 도덕의 기초 위에 도교신앙과 불교사상에 의거해서 서민의 생활윤리를 설파하는 민중도덕서이다. 대표적인 선서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이 강남의 하층 독서인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것도 이 무렵이다. 송대 이후의 신도교 교단은 용호산의 정일교(天師道가 正一敎로 불리게 된 것은 元代부터이다) 등 구(舊)도교 교단과 함께 명조 이후, 왕조에 따라서 보다 강하게 관리되었다.
 
원의 세조(世祖)는, 강남의 도교는 정일교에, 화베이의 도교는 전진교에 그 관리권을 주었으며, 도첩(度牒)의 발급과 지방의 도관(道官)의 임명권도 부여했다. 명조에서는 예부(禮部)에 도록사(道錄司)를 두고, 정일(正一)·전진(全眞)으로 나누어서 관리했다. 다시 용호산에다 정일진인 이하의 도관을 두었고, 모산·태화산(太和山) 등에도 도관을 두었다.
 
원말(元末)부터 정일교와 왕조의 결합이 강화되었고, 특히 명초에는 정일교의 부참(符讖)이 명조와 정일교의 연결을 밀접하게 했다. 이리해서 명조는 정일교 교단을 중심으로 도교계를 관리했다. 또 명의 영종(英宗)은 1445년 《정통도장(正統道藏)》을, 신종(神宗)은 1601년에 《만력속도장(萬曆續道藏)》을 편집케 했다. 이것이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도장(道藏)이다. 왕조의 관리하에서 불·도 교단은 그 활력을 잃었고, 그 위에 15세기 후반부터 재정 보전(補塡)을 위하여 승(僧)·도(道)의 매첩(賣牒)을 단행했으므로 승·도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었고, 민간의 종교 결사가 많이 생겨났다. 청조는 명조의 정책을 답습해서 불·도 양교 및 민간의 종교결사의 관리·단속을 엄중히 했으며, 정일천사(正一天師)의 관품(官品)을 낮추었다

12) 시크교
인도하면 터반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인도를 가기전에 나도 그랬으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터반을 두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시크교이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면 11세기 이후로 계속 되었든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절정에 달하고있던 때였다. 양측이 서로 종교의 이름으로 죽고, 죽이기를 몇세기를 이어내려 오면서 대립도 했지만, 나름대로 이슬람은 힌두교에서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힌두는 이슬람으로부터 종단 조직에 대한 것들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한 경향도 없지 않아 있는데, 시크교의 창시자인 구루나낙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결국 가다 보면 이슬람이니 힌두니 하는 구분조차 필요 없다고 역설한다.

이 새로운 비젼으로 그는 3차례의 순례여행을 떠나는데, 그의 뜻에 맞는 사람들이 모여 종교조직을 이룬 것이 시크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슬람제국 무굴제국이 성립되고, 무굴의 지배자들과는 때로는 협력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고 또 황제에 따라 대립하기도 했었는데, 17세기 구루 하르고빈대에 이르러서는 무굴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한 상시적인 무장군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의 뒤를 이은 두명의 구루들 역시 무굴과의 대립과정에서 죽으면서 10대 구루에 이어서는 법통마저 끊기게 된다. 암리차르에 있는 시크교 사원인 황금사원은 이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곳으로 여행자들에게는 그저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인심좋은 사원일 뿐이다.

무굴이 망하고 영국이 들어오면서도 이네들의 신앙공동체는 계속 시련을 겪었는데, 세포이 항쟁당시 영국측 입장에 섰던 관계로 민족 반역자가 되기도 하고, 독립이후에는 시크교의 주 무대인 펀잡주가 파키스탄과 인도에 양분되는 사태에도 이르게 된다. 가장 최근인 인디라 간디 수상대에는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암릿차르 황금사원을 점거했고, 인디라 간디는 성스러운 사원에 탱크를 몰고 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결국 몇달후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경호원이던 시크교도에 의해 암살되게 되고, 이 사건 직후 성난 힌두교도들에 의해 수많은 시크교도 들이 학살당하게 된다.(이들은 터반이라는 외형적 특징 때문에 숨길수가 없다.
 
 이 학살극을 계기로 터반을 하지 않는 시크교도 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기마다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들은 인도인들에 비해 덩치나 외모가 큼직하기만 한데, 이런 이유로 군대나 경찰쪽에서는 상당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13) 일본 신도

신불습합 (神佛習合, Shinbutsu-shugo)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와 외래 불교의 융합을 가리키는 말.

신도와 불교의 융합은 6세기 중엽 불교가 일본에 유입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두 종교의 융합과정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한다.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은 흔히 가정에 신도의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부쓰단[佛壇]을 두고 있으며 결혼식은 신도식, 장례식은 불교식으로 치르곤 한다.

신도와 불교의 공존양식은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741년 나라의 도다이 사[東大寺]에 거대한 불상을 조영하기에 앞서 불상 건축계획을 이세 신궁[伊勢神宮]에 모신 신도의 최고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게 아뢰었다. 또 군신(軍神) 하치만[八幡]에게도 도움을 구했으며 규슈[九州]에서는 도다이 사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원 내에 우사 하치만 신사[宇佐八幡神社]의 한 분파가 건립되었다. 그 이후로 불교사원 경내에 신사를 건립하거나 신사 근처에 사찰 또는 불탑을 건축하는 관행이 발전했으며 신사에서 불경을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신도의 가미[神]는 불교의 부처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 초반에는 신도와 불교의 융합 경향을 설명하기 위한 불교이론인 혼지스이자쿠세쓰[本地垂迹說]가 등장했다. 형이상학적인 부처는 본래의 근본실체(혼지)이며 역사 속의 부처는 그 실체의 화신(스이자쿠)이라는 이론이다.
 
신도와 불교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처와 신도의 신은 궁극적으로 통일체이지만 부처는 혼지이며 신도의 신들은 그 화신인 스이자쿠인 것이다. 불교의 여러 종파와 신도의 융합(때로는 중국의 도교도 받아들임)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한때 신사의 신관은 불교 승려들보다 지위가 낮았으며 신도의식에서조차 보조적인 존재로 격하되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정신적 각성기 동안 신도는 불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는데 이세 신도[伊勢神道] 운동은 신도의 신이 부처의 현시가 아니며 오히려 부처와 보살이 신도의 가미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두 종교는 메이지[明治] 신정부 초기에 취해진 개혁조치에 의해 분리되었다. 신정부는 1868년 신사에 관계하는 불교 승려들에게 신사의 신관이 되든가 환속하라는 칙령(신불분리정책)을 발표했다. 불교 사원에 속한 토지들이 몰수되었으며 황실 내에서의 불교행사가 폐지되었다. 이후 신도는 국가적 종교로 선포되었으며 종교를 초월하는 국가적 숭배의식으로 재해석되었다.→ 국가신도

14) 신종교 (新宗敎)

개요
성립시기가 오래된 제도종교와는 달리 새롭게 형성된 종교.
신흥종교라고도 한다. 이때 '새롭다'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고정된 기준을 설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성종교보다 역사가 짧기 때문에 교리의 정교화, 종교의례의 제도화, 교단조직의 체계화 측면에서 초보적인 수준을 나타내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이른바 '결핍된 종교'로 비춰지기도 한다. 또한 기존의 종교와 다른 측면을 내세운다거나 강조하기 때문에 제도종교로부터 이단·유사종교·사이비종교·사교(邪敎) 등으로 배척받기도 하나 사실 그 근거는 자의적·결과론적이다.
 
자의적이란 의미는 종교와 유사종교를 가르는 기준이 애매모호하다는 것이며, 결과론적이란 의미는 사회의 윤리규범에 결과적으로 어긋났을 경우 사이비종교 또는 사교의 표지가 붙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제도종교가 신종교에 대해 가하는 부정적 평가는 기득권 침해에 대한 예민한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신종교 가운데 기존의 제도종교를 극복하고 나와야 할 만큼의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오히려 기존사회의 타락한 흐름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발생원인
신종교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첫째, 사회구조적 결함, 둘째, 기존종교의 결함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회구조적 결함의 관점은 사회의 급격한 해체 및 변동, 전통적 공동체의 권위 상실, 그로 인한 아노미 현상, 상대적 박탈감 등으로 생겨난 불안해소의 구조로 신종교를 설명하는 것이다. 기존종교의 문제점의 관점은 기존종교의 물질주의 성장 위주의 정책, 중산층 중심 경향, 권위주의적·경쟁주의적 성향을 지적하면서 하층민의 소외를 신종교 등장의 원인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신종교가 지니고 있는 창조성, 탄력적 반응의 능력들을 무시할 위험성이 있으며, 신종교를 병리적 현상으로 규정짓게 된다. 종교와 도덕규범이 비록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종교를 기존 윤리의 척도로 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기존 도덕규범의 정체성(停滯性)·경직성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를 신종교에서 제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황 및 전개
한국의 신종교를 거론할 경우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시기와 1950~70년대에 걸친 시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첫번째 시기에 나타난 신종교는 동학·증산교·대종교·원불교 등이 대표적이며, 2번째 시기에는 통일교·대순진리회·천부교·영생교 등이 유명하다.

동학은 서학, 즉 서양종교 및 서구적 세계관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 성립된 종교운동으로 반외세의 민족운동과 반봉건의 민중운동을 결합시켰다는 관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최제우가 죽은 뒤 최시형이 탁월한 지도력으로 교단조직과 교리체계를 정비했으나 갑오농민전쟁의 패배 후 체포되었다. 그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학계 신종교로는 시천교(侍天敎)·수운교(水雲敎)·진동학제화교(眞東學濟和敎)·동학본부(東學本部) 등이 있다.

증산교는 증산(甑山) 강일순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갑오농민전쟁 패배 후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후천개벽'(後天開闢) '해원상생'(解寃相生)이 주요사상이며 주술적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강일순이 죽은 뒤 후처인 고씨부인(본명은 高判禮福)이 1941년에 선도교(仙道敎) 또는 태을교(太乙敎)를 창립했으며 그밖에 증산대도교·제화교(濟化敎)·미륵불교·보천교(普天敎) 등이 나타났다.
 
그중에서 보천교는 가장 두드러지게 신장되어 교주인 차경석(車京石)은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면서 황제 즉위식을 갖기도 했다. 신도수가 자칭 600만 명, 간부가 60만 명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교세가 강성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받고 위축되었다.
 
그후 보천교 내에서 계속 분파활동이 일어나 동화교(東華敎)·태을교·무을교(戊乙敎)·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보화교(普化敎)·인천교(人天敎) 등이 생겨났으며 다른 증산계에서도 증산교본부·순천교(順天敎), 태극도(太極道)·법문파(法文派)·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 등이 분파되어 일제강점기에는 100여 개에 달하는 신종교군이 형성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으로 교단이 해산되었으나 8·15해방 후 재건되어 현재 증산 계통의 신종교는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조철제의 태극도에서 파생된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로 1972년 박한경에 의해 창시되었다. 30만 명이 넘는 신도수를 지니고 있고 1992년 대진대학을 설립했으며 교육사업 및 의연금 기탁 등으로 유명하다.
 
증산사상연구회의 학술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증산진법회(甑山眞法會)는 1973년 배용덕에 의해 창시되었으며, 증산사상에 관한 활발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대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증산도는 경전(耕田) 안중건(安重建)이 1980년 대법사증산교(大法社甑山敎)에서 개명하고 종정(宗正)으로 취임하면서 활발해졌다. 대학 내의 동아리와 강연회를 통해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조직화한 것으로 1909년 홍암(弘巖) 나철(羅喆:1864~1916)이 창시했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하여 한일합병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항일무장투쟁중 유명한 청산리대첩은 바로 대종교신자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탄압으로 교세는 많이 위축되었고 8·15해방 후에도 신장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1980년대의 새로운 민족주의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자체 정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밖에도 개천교(開天敎)·단군영모회(檀君永慕會)·아아신궁(亞亞神宮)·광명도(光明道)·단군성주교(檀君聖主敎)·한얼교 등 50여 개의 단군신앙계 신종교가 있다. 그중 신정일이 1965년 창립한 한얼교는 1987년 정당을 창당하여 대통령후보를 낸 바도 있다.

동학계·증산계·단군신앙계 이외에도 1915년 이선평에 의해 창시된 각세도(覺世道)와 그로부터 파생된 대각교(大覺敎)·정도교(正道敎)·천인교(天人敎)·귀임교(歸任敎) 등의 신종교들이 있다. 또한 김봉남에 의해 창시된 봉남교(奉南敎) 계통의 신종교군도 20여 개 존재한다.
 
찬물을 마시게 하여 질병을 고치게 하므로 찬물교라고도 하는 물법계[水法界] 또는 봉남교계의 신종교로는 무량교(無量敎)·용화삼덕교(龍華三德敎)·태화교(太和敎)·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삼법수도원(三法修道院)·대한도교(大韓道敎) 등이 있다.

원불교는 소태산(少太山) 박중빈에 의해 1916년 창시된 종교로 저축운동과 간척사업을 통해 기반을 닦으면서 독자적인 불교계 교단을 형성했다. 8·15해방 후 전라북도 이리의 원광대학교를 중심으로 교리체계화작업과 교단정비작업을 펴서 현재 건실한 교단운영을 하고 있다. 그밖에도 영가무도교(詠歌舞蹈敎)·대종교(大宗敎)·광화교(光華敎)·금강불교(金剛佛敎) 등의 남학계(南學系) 신종교와 갱정유도(更定儒道)로 대표되는 유교계 신종교가 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기독교계 신종교가 두드러졌는데 사회 전반적으로 기독교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시대 분위기와 연관이 있다. 이중 통일교는 정식명칭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로서 1954년 문선명에 의해 창시되었다. 교주의 체험에서 비롯된 반공주의와 성적 타락을 주장하는 성서 해석이 독특하며, 방대한 기업경영과 세계적 규모의 언론계 및 학계를 소유하고 있다.
 
국제적 명성에 비하면 국내 신도수는 적은 편이나 최근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다. 1950년대부터 활발한 전도활동을 전개한 박태선은 교단 전도관(傳道館)을 세우고 곳곳에 신앙촌을 건립하면서 메시아를 자처했다. 승리제단 또는 영생교는 조희성이 전도관에서 나와 1980년에 만든 교단으로 급박한 종말을 주장하면서 교인이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며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밖에도 1980년 통일교를 탈퇴하고 정명석이 세운 애천교회, 1964년 안상홍이 세운 안상홍증인회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동학계·증산교계·단군신앙계·유교계·불교계·남학계·기독교계뿐만 아니라 관성교(關聖敎)·무량천도(無量天道)와 같은 무속계 신종교도 있고 점술과 관련된 구통도가(九統道家), 외계인과 UFO에 관련된 우주신령학회, 라에리안 운동협회와 같은 신종교도 있다. 한편 외국의 종교들이 한국에 유입된 경우에도 그것을 신종교의 범주에 넣어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본계의 일련정종(日蓮正宗), 천리교(天理敎), 생장(生長)의 가(家), 선린회(善隣會), 중국계의 일관도(一貫道), 미국계의 여호와의 증인, 모르몬교, 안식교, 하나님의 자녀 등이 그것이다.

사회사적 의미
종교는 일반적으로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따라서 신종교의 발생은 사회의 변동에 대한 반응이면서 동시에 사회변동의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신종교와 사회변동의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것이다. 신종교는 사회의 왜곡된 모습을 보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사회를 새롭게 갱신시키는 참신한 전망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신종교는 양가적인 가치와 방향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쪽 면만을 볼 경우에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15) 민간신앙
복 (福)  
편안하고 만족한 상태 또는 그에 따르는 기쁨.
일반적으로 행복이나 길운(吉運)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자연숭배·조상숭배·샤머니즘 등의 형태로 유지되어온 민간신앙은 언제나 현세 기복(祈福)에 그 목적을 두어왔다. 이런 신앙행위는 유교·불교·도교 등의 종교가 유입되자 이들과 융합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복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굳이 유교·불교·도교 등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복은 일상생활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즉 "아내를 잘 얻는 것도 복이다", "누구든지 자기 복은 지고 태어난다"는 등의 말처럼 복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행위들을 실제로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복은 우리 생활과 밀접하다.

복의 개념은 2가지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다.
첫째는 불교와 관련된 개념이다. 불교의 대삼재(大三災)인 화재·수재·풍재와 소삼재(小三災)인 도병재(刀兵災)·질역재(疾疫災)·기근재(饑饉災), 그리고 팔고(八苦)인 생·로·병·사·애별리고(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고통)·원증회고(怨憎會苦:미워하는 사람과 마주쳐야 하는 고통)·구부득고(求不得苦: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오음성고(五陰盛苦:色·受·想·行·識의 五蘊이 성하여 일어나는 고통) 등과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재팔고가 모두 현세의 액이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복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둘째는 유교적인 개념이다. 이는 오복이나 삼복 등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오복은 〈서경 書經〉에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有好德)·고종명(考終命)으로 언급되어 있고, 삼복은 연명장수(延命長壽)·부귀영화·평강안녕(平康安寧)을 의미한다. 이 역시 모두 현세의 액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또는 현세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다.

복을 얻기 위한 행위로서 소극적으로는 액막이·나례(儺禮:악귀를 쫓는 축귀의례)·부적·방귀매(防鬼枚: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빗자루로 창살을 두드려 잡귀를 문 밖으로 내쫓는 민간신앙) 등으로 표현되었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성공제(誠貢祭)·기은제(祈恩祭)·고사(告祀)·굿 등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런 기복행위는 구체적인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복을 주관한다고 믿었던 제석신(帝釋神)·대감신(大監神)·성주 등의 신격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 신격은 인간의 수명·재물·성공을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민간신앙에서 토착화된 불교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삼성각(三聖閣)·산신각(山神閣)·칠성각(七星閣) 등에 모셔진 신격도 역시 이들과 동격이었다.

한편 복을 비는 행위나 상징은 가신(家神) 신앙을 통해 잘 나타났다. 가신 신앙은 집안에 깃들어 있는 신을 모시는 무속의 일종으로 집에는 다양한 신격들이 있어 이들이 집안의 요소요소를 도맡아 보살펴준다는 믿음이었다. 명절이 되거나 별식(別食)이 생기면 우선 가신에게 바쳤고, 정초의 안택(安宅)이나 가을 상달고사 때는 이들 가신에게 고사를 지냈다. 이들 신이 보살펴주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들이 복을 받고 편히 살며 집안의 대소사가 평안하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가신에는 집안의 죽은 조상을 모시는 조상신, 출산신인 삼신, 외양간신인 우마신, 뜰의 신인 지신, 샘의 신인 우물신, 장독의 신인 철룡신 등 다양했다. 또한 의식주생활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식생활의 경우 명절의 음식에 잘 나타났다. 설날에는 새로운 정신과 몸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복을 빌며 차례도 지내고 세배를 하는데, 이때 반드시 떡국을 먹어야만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또다른 기복의 행위는 간지(干支)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간지는 10간과 12지를 서로 조합하여 만든 60개의 순서를 통해 우주만물을 주역의 이치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이는 결혼·장례·이사 등 특정일의 날을 잡는 일에 이르기까지 민간생활과 아주 밀접한 것이었다. 특히 사람의 생년·월·일·시의 간지를 사주(四柱)라고 하는데, 사주가 그 사람의 운명을 미리 결정한다는 속신의 발생과 함께 혼인의 택일, 남녀의 궁합을 정하거나 흉일을 피하는 비방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길흉사를 결정하는 각종 재난을 미리 예언하여 이를 피하고자 하는 수단으로도 사주는 이용되었다.

기복행위는 제액(除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세시풍속에 따라 정기적으로 행해졌다. 조선 후기의 혼란한 사회상황에서 복에 대한 갈망은 각종 신종교 발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또한 외래종교가 유입되더라도 민간에서는 이를 기복적인 성격으로 변형시켜 흡수했다.
崔禎鎬 글

인격신 (人格神)
인간적인 의식이나 형상을 지닌 신.
유신론의 대표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인 유일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 신격화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전자의 의미로서의 인격신은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 대부분의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격적인 신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의 원시시대에서는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만물이 제각기 정령(精靈)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정령이 곧 숭배의 대상이었는데, 이와 같은 신관을 자연신관이라고 한다. 이 자연신에서 바빌로니아·이집트·그리스 등에서 볼 수 있는 다신교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신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부여한 데서 유일신의 형태가 도출되었다.
 
유일신으로서의 인격신은 창조와 섭리, 그리고 심판(審判)의 신이며, 신은 이 세계와 우주의 모든 존재를 창조한 유일의 초월적 존재이다. 즉 신은 역사와 개인생활에 개입하면서, 모든 것을 섭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존재이다. 신은 또한 합리적인 사고를 초월하는 존재로서 계시를 통해 자기자신을 드러내며, 인간은 초자연적인 은총의 빛을 통해서만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개념은 이신론적(理神論的)인 관념이나 범신론적(汎神論的)인 관념에서의 신개념과 구분된다. 이신론은 신을 존재하는 세계의 근거 및 원인으로서 파악하며, 범신론은 존재 그 자체를 신으로 파악하고 신을 초월적 존재가 아닌 전체로 보는 데 반해, 유일신으로서의 인격신은 인간을 유한성 및 모순과 부조리의 상황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절대적·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한편 후자의 의미에서의 인격신은 주로 신령사상(神靈思想)이나 민간신앙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령사상은 종교학적 의미에서의 아니마(anima)나 아니마트(animat)를 의미하는 넋[靈]이 실체로 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사람에게 길흉화복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고, 그러한 신령을 숭배 또는 경외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령사상은 죽은 사람의 넋인 사령(死靈), 역사적인 인물들의 넋인 위령(威靈), 산에 사는 산령(山靈) 등 셀 수 없이 많으며, 민간신앙에서는 이러한 영들과 융합한 존재를 신명(神明)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신명들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천신(天神)인데, 무속신앙에서는 총천신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신령사상과는 별도로 한국의 개국시조(開國始祖)인 단군이나 박혁거세, 동명왕(東明王) 등은 사후에 신격화된 인물들이다. 민간신앙에서는 기복(祈福)을 목적으로 역사상의 여러 인물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조상숭배 (祖上崇拜, ancestor worship)
 
개요
죽은 인척의 혼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종교적 신앙과 의식.
이들 중에는 신화적인 인물도 있을 수 있다. 조상숭배는 죽은 자의 영혼을 섬기거나 두려워하는 것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넓은 지역에 걸쳐 여러 문화에 나타난다. 조상숭배는 아프리카·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문자사용 이전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고대 지중해 연안의 민족과 고대 유럽 민족 가운데에도 나타났으며, 아시아 문화권, 특히 한국·인도·중국·일본에 뚜렷이 나타난다.

조상숭배가 행해지는 문화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공동체의 서로 다른 두 계급이 맺고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죽는다고 해서 어떤 사람의 사회적 단위(가족·씨족·종족·촌락·국가)에 대한 귀속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우호적인 존재, 즉 친척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은 자가 잠시 동안 후손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에게 분노할 수 있으며 이런 마음은 응분의 존경·경외·숭배를 나타내 보이면 사라진다고 본다.
 
죽은 자, 특히 죽은 타향인의 영혼은 그 사회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대적인 존재로서 개인이나 사회 전체에 해를 줄 수 있는 악의를 지닌 영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위와 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조상숭배는 몇 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죽은 자가 살아 있을 때 속해 있던 사회의 구성원인 가족·씨족·종족·국가가 죽은 자를 숭배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공동체 단위의 숭배는 로마의 마네스(조상의 영혼) 숭배에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이때에는 특정한 혈통에 속한 영혼을 섬긴다. 이 경우 죽은 개인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고, 생명력(genius)으로 간주되었다. 보다 널리 행해지는 조상숭배는 조상 개개인의 숭배이다. 이러한 조상숭배는 공동 숭배와 다양한 방법으로 결합된다. 로마의 황제 숭배와 이집트의 선왕(先王) 숭배, 일본의 황실 숭배 등이 그 예이다.

모든 조상들이 똑같은 숭배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조상이 다른 조상보다 더 능력이 있는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한 집단의 평범한 일원이 죽었을 때는 직계만이 그를 돌보아주거나 전혀 돌보지 않거나 또는 일정 기간만 돌보는 반면, 위대한 명사(名士)는 사회 전체가 정성들여 숭배한다. 유명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연장자라는 이유 때문에 조상숭배의 서열에 끼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가계(家系)의 시조(始祖)는 여러 세대가 지난 후에도 계속 그 가문의 숭배를 받을 수 있다. 어떤 한 선조가 경배받을 만한 모든 특성을 겸비하고 있거나 어떤 특성을 탁월하게 보여주면 그는 죽은 영으로 간주되지 않고 신(神)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이를 보여주는 분명한 실례는 아스클레피오스이다. 그는 그리스의 여러 지역에서 신으로 숭배받는 인물이지만 영웅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또한 그를 공경하는 일만 하는 아스클레피아다이(의사들의 조합)도 있다.

조상의 영들을 불러서 기도하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의 공동체를 여러 방면으로 도와달라고 빌기 위해서이다. 즉 가계가 계승되고 질병과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풍성한 농작물을 수확하고(조상들이 땅에 살고 있다고 간주했음) 신들에게 중재하도록(조상들은 신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늘이나 혹은 신들의 거주지에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음) 빌었던 것이다. 조상의 영혼들과 신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상이 신보다 열등하기는 하지만 조상의 영이 살아 있는 자들보다는 신의 호의를 더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조상숭배
한국의 조상숭배는 유교의식인 제례(祭禮)와 민간신앙의 가신신앙(家神信仰)이나 무속(巫俗)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제례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가족은 죽은 조상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므로, 조상은 이승에서 후손과 함께 살고 있는 존재이며, 집은 조상과 후손이 함께 거주하는 장소이다. 이런 이유로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은 가옥구조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일정한 시기마다 지내는 조상들에 대한 제사는 집안의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사당은 가정생활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가정사는 대부분 사당 앞에서 행해졌으며 집안의 대소사는 먼저 사당에 계신 조상에게 알린 다음에 이루어졌다. 아침마다 사당에 문안을 드렸으며, 청명(淸明)·한식(寒食)·중추절(仲秋節)·중양절(重陽節) 등의 명절 때가 되면 새로운 음식을 올리는 신례(新禮)를 지냈다. 이러한 사당제(四堂祭) 외에도 계절마다 중월(仲月)인 2·5·8·11월에 지내는 사시제(四時祭), 9월에 부모에게 올리는 미제(彌祭)와 기제(忌祭), 차례(茶禮), 묘제(墓祭) 등의 제례가 있었다.

지금도 중요하게 행해지고 있는 유교의 조상제례에는 크게 기제·차례·묘제의 3가지가 있다. 기제는 장손의 부(父)·조(祖)·증조(曾祖)·고조(高祖) 등 직계 4대조에 해당하는 조상들과 그 정식 배우자들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 것으로, 대개 죽은 날 자정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기제사의 대상 가운데 여자 조상은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자격이 아니라 남자조상의 부인자격으로 제사를 받는다.
 
차례는 정월 초하룻날과 추석에 드리는 명절제사로서, 장손의 집에서 제사지내는 모든 조상들을 다 모시고 음식을 차려 인사드리는 것이다. 명절제사 때는 4대조의 직계조상뿐만 아니라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남계의 방계(傍系)조상과 친족에 대해서도 제사를 드린다. 묘제는 시제(時祭)·시향(時享)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지역에서 문중을 형성하고 있는 씨족마을 성원들이 그 문중의 중시조(中始祖)나 입향시조(入鄕始祖)를 시작으로 5대조 이상의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대개 음력 10월에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조상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드린다. 유교에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의 제례를 통해 죽은 조상과 살아 있는 후손 사이에 친밀하고 지속적인 상호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왔다.

유교의 제례가 한국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상숭배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민간신앙에서 이루어지는 조상숭배의 모습도 아울러 살펴보아야 한다. 민간신앙에서의 조상숭배는 가신신앙과 무속에서 볼 수 있다. 가신신앙에서의 조상숭배는 가신의 하나로서조상신(祖上神)을 모시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조상신은 안방의 윗목에 위치한다고 여겨지며, '제석오가리'(전남)·'조상단지'(전북·경남)·'세존단지'(경북)·'제석주머니'(서울·경기)·'조상님'(충남) 등의 여러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단지·항아리·주머니 등의 형태로 모셔진다. 단지나 주머니 속에는 쌀을 넣어두었다가 매년 가을에 신곡(新穀)이 나면 햅쌀로 바꿔넣으며, 묵은쌀로는 밥을 지어 식구들끼리만 나눠 먹고 남에게는 절대로 주지 않는다. 그 단지 속의 쌀의 양이 늘어나면 풍년이 들고 집안이 잘 되지만, 양이 줄거나 빛이 변하면 흉년이 들거나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정성껏 모신다.

조상신은 종손이나 맏아들의 집에서만 모셔지며, 명절이나 가족의 생일 때 음식을 바쳐 농사가 잘 되고 집안이 무고하며, 자손이 잘 되기를 빈다. 제물로는 밥·떡·나물·돈 따위를 놓으며, 술이나 고기는 놓지 않는다. 제석오가리·세존단지·제석주머니 등의 명칭과 제물에서 드러나듯이 가신신앙에서의 조상은 불교적 성격과 삼신(三神)의 성격, 그리고 농신(農神)의 성격 등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로서 유교적 의미의 조상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신의 하나로서 집의 중심부인 안방에 모셔지고, 여러 계기를 통해 조상신이 모셔진다는 것은 가신신앙에 있어서도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계를 갖게 되는 가족의 한 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유교제례의 신주·위패(位牌)의 변형으로 볼 수 있는 '신주단지'·'등오가리'(호남지방)·'조상당세기'(영남지방)는 4대조 이내의 조상에 대해서 같이 모셔지기도 한다.

무속에서 조상숭배와 관련되는 것은 흔히 '조상거리'·'조상굿'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는 절차이다. 이 절차는 굿하는 집안의 모든 조상을 윗대부터 차례로 모시는 절차로 살아 있는 후손이 조상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조상을 청하여 조상의 도움을 비는 것이다. 이때 청해지는 조상은 직계·방계의 구분이 없으며 남녀의 구분이 없다는 점에서 직계와 방계, 남녀의 구분이 엄격한 유교적 의미의 조상개념과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굿을 통해 조상이 청해지고 도움이 요청된다는 것은, 무속에서도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지속적인 소통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교적 제례와 민간신앙의 가신신앙 및 무속에서 나타나는 조상숭배는 조상의 개념과 조상을 모시는 형태에서 나름대로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조상숭배는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즉 조상은 죽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후손들과 끊임없이 상호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상은 죽음과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분리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의 성원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의 조상숭배는 죽은 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된 것이며, 가족은 죽은 조상과 살아 있는 후손이 함께 이루는 공동체로서, 죽은 조상은 살아 있는 후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비교종교 연습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 (출처 : 이찬수의 종교철학 에세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불·선과 같은 전통 종교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틀지어져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 안에는, 설령 한국의 오랜 전통을 부정하려는 그리스도교인이라 할지라도 유교적 가치도 들어있고, 불교적 가치도 들어있다. 그리고 무교적 가치도 들어있다.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도 그렇다.
 
100여년 전 한국에 들어온 한 개신교 선교사[H.B.Hulbert]는 당시 조선인의 종교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인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며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에 처했을 때는 영혼숭배자이다." 이 말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 유교문화와 그리스도교
특히 조선시대 이래로 한국인은 누구나 유교인이 되었다. 가령 자신의 종교를 묻는 질문에 유교라고 답하는 사람은 1% 내외에 그치지만, 한국 사람의 절대 다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교적 가치를 산다. 한국 사회는 그리스도 교회조차도 유교적 질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교적 질서란 무엇인가? 그 질서의 핵심은 자식이 부모를, 백성이 임금을,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모시는 '효'(孝), '충'(忠), '서'(序)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효, 충, 서를 한 마디로 묶으면 '경'(敬)이 된다.

특별히 '효'는 한국 전통 교육의 핵심 덕목이어왔다. 한국의 교육계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효경>(孝經)을 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해왔고, 불교에서는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여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과 같은 경전이 널리 읽혀져 왔을만큼 '효'를 강조해왔다. 이것은 종파를 막론하고 한국의 교육 현장이라면 어디서나 적용되는 사실이다.

한국 그리스도교인도 "부모를 공경하라"(출애 20,12) 내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에페 6,1; 골로 3,20)는 말씀을 하느님의 계명이나 말씀으로 지킨다지만, 그것이 성서에 써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 십계명에 그런 말씀이 있다고 해서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부모 공경의 태도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람은 옛날부터 이미 유교적 가르침에 입각해 부모를 공경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이든 누구든 부모를 공경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유교적 가르침의 핵심이다. 한국인은 유교적 질서에 따르면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효'를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 곧 '충'(忠)이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특히 조선 중기 이래 '효'와 그것의 확대로서의 '충'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가족국가 체제를 유지해왔다. 국가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사실상 거대한 가족적 체계였다. 조선 왕조는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 안에서는 가부장적 '효'의 질서를 강조하고, 그것을 왕에게 적용하여 '충'의 차원으로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국가적 통치 전략을 세워온 것이다. 이것은 조선 사회가 가족적 질서를 기반으로 통합되어 있던 사회임을 뜻한다.

또 전통 사회 질서의 근간인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오늘까지도 우리 사회 안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유교적 덕목이다. 한국 사람은 교회든 절이든, 아래 위를 나누지 않으면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나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말을 높여야 할지 내려도 될지도 정해진다. 가정이든 학교든, 사회질서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공경'하고, 언어 구사에 있어서는 '경어'를 제대로 구사할 때, 즉 '경'을 실천할 때,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평을 듣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거의 유교에서 받은 영향이다. 이런 영향을 받아 산다는 점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도 유교적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다.
설령 제사를 지내지 않는 보수적 개신교 집안이라고 할지라도, 가정 교육만큼은 기본적으로 유교적 원리와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여전히 '엄부자모'(嚴父慈母)의 분위기가 통용되며, 이상적인 가족관은 엄한 아버지를 가족의 정점으로 하고서 따듯한 어머니가 그 체계를 뒷받침해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체계를 유지시켜나가게 해주는 대표적인 행사가 전통적인 집안 제사이다.

2. 제사와 그리스도교
한국인은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현재까지 여전히 대다수가 정기적으로 제사를 드리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 제사적 분위기는 여전히 유지해오고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제사 지침까지 마련할만큼 제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며, 대다수 개신교 집안의 경우는 전통적 제사 대신 추도예배라는 형태로 의례의 모습을 바꾸어 드리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도 제사 풍습의 연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사와 추도예배는 그 심리적 정서에 있어서도 사실상 그다지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면서도, 조상을 모시는 정신까지 부정할 수는 없기에, 추도예배라는 옷을 입은 다른 형태의 제사를 계속 드리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유교 위에서, 이미 유교인이었던 한국인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타의 유교적 관혼상제 의식은 여전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상숭배 금지조항을 그리스도교적 정통 신앙 체계로 인정하기에 절하는 행위만은 금지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상' 앞에 절을 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하지만(특히 개신교의 경우), 본래 유교인이기에 3일장이나 폐백같은 전통적인 의례는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지면서 제사 때 조상에게 절을 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전통적
으로 가져왔던 혈연적 가족 중심의 문화로 인해 한국 그리스도교인이 주로 하는 기도의 내용은 '우리 가족의 건강과 축복'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것은 모두 한국의 전통적 정서를 무시하고서는 그리스도교적 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성서적 규범을 근거로 그리스도교적 질서가 잡혀나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역으로 전통적 질서를 그리스도교적으로 해석하고 구체적 생활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적 질서도 이루어져나가는 것인 셈이다.

3. 무교와 불교 문화
또 오늘날 부흥하는 대형 개신교회는 대부분 무속적인 뜨거움을 추구하는 교회이다. 한국 개신교의 부흥회, 통성기도는 굿판과 달라보이지 않는다. 성령쇄신운동을 유지·발전시켜나가게 만드는 가톨릭의 분위기도 사실상 우리나라의 무교적 기질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유독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새벽기도회나 새벽미사는 새벽 치성을 드리던 무교적 분위기 내지는 새벽 예불이 주는 종교적 경건함의 연장이다. 단군은 물론, 고구려, 신라의 첫 왕들도 모두 무당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 등 우리나라 민족종교의 창시자들 역시 무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증산교(대순진리회 포함)의 중심사상인 해원(解寃)은 무교의 살풀이 정신과도 다르지 않다. 세련된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조선조 성리학자들도 제사만큼은 진지하게 바쳤는데, 이 제사라는 것이 신을 모시고, 받들고, 보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무교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무교인이었던 한국인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중국의 유학을 '궁리'(窮理)의 차원에서 받아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무교 문화는 전체적으로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교 문화는 한국인의 골수에 박혀있는 한국 종교문화의 또다른 정수이다. 무교는 다양한 외래의 신들마저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포용적이며, 그러한 포용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해나간다. 그러기에 수천년 동안 한국적 정신의 깊이를 구체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한국인의 원초적 정신 속에 깃들어 있다.
 
그리스도교가 무교를 '미신'시하고 대대적인 타파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무당의 숫자는 도리어 늘었고, 그리스도교는 도리어 무교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될만큼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무교 역시 끊임없이 변용, 지속, 생성되고 있는, 지극히 현대적인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4. 종교문화의 상호 침투
이런 식으로 한 사회 안의 종교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새로 들어온 종교는 기존의 종교문화 전통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간다. 한국의 경우, 사회적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유교적 윤리(삼강오륜)에, 인생의 신비 내지는 초월적 세계에 있어서는 불교에, 생사관, 신령관에 있어서는 무교에 영향을 받아왔고, 여기에다 도교적 신선관, 유교적 상제관 등이 중층적으로 보태지면서 한국적 종교를 이루어온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짧은 시간 안에 독자적 신학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고도의 유교와 불교철학적 훈련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학과 불학은 전통적 한국 사상의 핵심인만큼, 이러한 전통 사상을 완전히 제외한다면, 사실상 그리스도교 신학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고 말해도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기존의 학문적 수준이 그리스도교 신학이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있도록 해주는 선이해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각종 사실들이야말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들이 아닐 수 없다.

타종교를 보는 불교인과 기독교인의 태도 (이찬수의 종교철학 에세이)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나는 이들 종교의 깊이와 넓이를 다음처럼 수치화해 표현해보곤 한다. 불교가 90%쯤 완성된 종교라면, 기독교는 60%쯤 완성된 종교라고. 그 교리적인 완성도에서 보면 불교는 기독교를 포용하고도 남을 깊이와 넓이를 가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수치상으로만' 그럴 뿐이다.
 
실제로 그만큼 깊고 넓으냐는 교리상의 문제와 다른 차원에 있다. 내가 보기에 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서구에서 불교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드디어 세계는 불교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며 쉽사리 받아들이고, 과학적 세계관이 불교적 세계관과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결국 서구 과학도 불교로 오게 되어 있다는, 다소 안일한 반응을 보이고 만다. 서구의 사상 조류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서구에서 발전시킨 과학적 세계관, 그 사상적 근거를 꿰뚫어보지도 못한채.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심 불교는 기독교보다 한 수, 아니 여러 수 위라는 심리적 위안감만 가질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런지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자세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어보인다. 그러나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우물에만 안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자신의 종교적 의무에도 충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자세의 핵심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공부해야 이해가 되고, 그래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모른 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보기에는 '다른 것'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이 드물어 보인다. 서양철학이나 기독교 신학을, 특히 기독교 신학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가 공감할 수 있을 만한 이론을 전개하는 불자를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보지 못했다.
 
불교를 공부하는 기독교인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형편이다. 기독교는 그 완성도가 60% 정도라고 해서, 언제까지 60%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은 40%를 채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제법 된다. 교리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 답답한 만큼 그것을 깨치려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답답한 기독교가 그나마 살아서 역사를 움직여오고 있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공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교는 나머지 10%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40%를 채우려는 기독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기독교가, 서양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서양을 제대로 보아야만 불교가 미래 사회에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수천년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거나 만만하지 않다.
 
도리어 거의 모든 불교 고전을 영역해놓았을 만큼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도리어 동양에 그 결과를 역수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양 세계의 치열함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있다. 치열함의 정도에서 불교는 서양에, 좁게 말하면 기독교에 미치지 못한다고 나는 본다. 종교성 자체가 그러한 치열함을 넘어서고자 한다지만,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태도 자체에 치열함이 없어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세계에 매일만큼 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치열한 매임과 속박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일테니까.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없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우물'에서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 세상 모두를 내 지혜의 '바다'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와 미신의 차이 (류재동)
신앙의 대상이 궁극적 실재이냐 아니냐로 따지는 것이다다. 많은 종교학자들이 일치하는 견해다. 궁극적 실재(Ultimat Reality)는 '리틀 부다'라는 영화에서 노스님이 'Ultimate Reality'라고 하는 부분을 유심히 들으셨다면 이해할 것이다. 미신은 궁극적 실재가 아닌 것을 궁극적 실재라고 착각하여 믿는 것을 말한다. 궁극적 실재란, 간단히 말하면 무엇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고 영원한 실재성을 갖는, 우리들에 의하여 그 존재성이 좌지우지되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신이 깨달은 다르마는 자신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다만 발견한 것이며 영원한 불변의 진리라고 설파한다. 이런 면에서 부처가 깨달은 진리도 궁극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주장에 의거하는 주관성은 있다. 하지만 일관된 면은 있어야겠다.
 
종교학자 요아킴 바흐는 미신의 예로서 가장 위험한 것으로 민족주의를 든다. 좀 의아해하겠지만, 요아킴 바흐가 독일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학자라는 것을 알면 이해가 갈것이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화할 때 얼마나 인류에게 폐해를 가져오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나치의 민족주의. 소극적으로 말한다면, 민족이란 것이 역사적으로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은 사실로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가 발견한 진리라든가 하느님이라든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볼 수 없기 때문이라도 그것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존재라고 증명하기는 어렵다. 나치즘 같은 이데올로기가 시한부 존재성을 갖는 반면에 기독교나 불교가 시대를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신앙되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타 종교를 다 미신으로 보는 입장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취하는 경우가 드물다. 타 종교에 자기 종교에 버금가는 윤리성과 심오함이 있을 경우에 동등한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고 상호 교류와 만남을 추진하는 것이 현대 종교들의 추세다. 가톨릭 교황도 불교나 힌두교에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한 적이 있다. 한국에 가톨릭계 대학교인 가톨릭 대학교와 서강대학교에 종교학과라는 학과가 있어서 타종교에 대한 개방적 연구를 장려하는 것도 이러한 취지와 부합하는 것. 불교에서도 요즘 들어서 기독교와의 대화 관계 서적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다.

사이비종교에 관하여 (류재동)
사이비 교주들의 특성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교들이 대부분 다소의 비합리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사이비 종교의 경우에는 그 도가 지나치다. 교주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 건강한 종교에서는 적어도 살아있는 사람 본인이 신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부처나 예수나 본인은 스스로 사람이라고 밝힌다. 뒤에 후계자들이 신으로 떠받들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는 하지만, 건강한 종교에서는 건강한 합리성에 어긋나는 과도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건전성이 다소 무미건조한 특성이 되기도 하다. 열광하기를 좋아하거나 무언가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는 것.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가족관계 등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흔들리고 이성의 기능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이비종교의 포교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노리고 접근하는 것
.
그리고 일단 신자가 되면 그 늪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여러가지 장치를 강구한다. 주로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교제를 차단하고 신자끼리만 어울리게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광신자 집단들이 외딴 곳에 격리된 시설을 두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도 건전한 종교와의 차이점이다. 건전한 종교에서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양지바른 곳을 선호하는데, 사이비 종교는 음지를 선호한다.

구제방법은 가까운 사람이 그런 곳에 빠져 있다면 그 주변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환경들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지만, 우선 그 집단에서 데려와서, 그 집단과의 연락을 차단해야 한다. 그리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기쁨과 신뢰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건전한 종교로 분류되는 종교들의 타락상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종교들이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기성 종교나 사회에 불신을 느끼고 이상한 사이비종교로 휘말려들어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 그러나 그것은 거시적인 일이고, 우선 그 사람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따뜻한 애정으로 신뢰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심한 경우 정신과 병원을 찾아가거나, 상담심리연구소에 가서 상담을 받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공권력이 미치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오히려 역효과가 있다고 얘기되고 있다. 박해를 받을 수록 독버섯처럼 퍼져나가는 특성이 있다는 것. 사이비종교 신자를 몰아붙이면 오히려 더 그 쪽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몰아붙이기보다는 건강한 사회생활의 기쁨을 누리고 현실 감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굳이 말한다면, 사이비종교 신자를 대하는 데에는 합리적으로 따뜻하게 대하고, 그 이상한 신념에 대해서는 아예 대꾸를 안 하고 다소 무시(경멸적 무시가 아니라, 관심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햇볕 아래서 세균류들이 죽어버리듯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사이비종교다. 비유하자면, 어두움은 빛이 올 때 사라지는 것. 어두움을 향해 팔을 휘저어보았자 팔만 아픈 것이다.
 
빛이란 곧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다.
사회적으로 사이비종교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려면 건전한 사회를 만들고 신뢰를 느끼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작게는 성실함과 따뜻함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중요하다. 많은 문제들이 가정의 불화에서 빚어지는 것.
피터버거라는 사회학자가 종교의 사회적 심리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으므로, 그 저서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류재동)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느냐에 대한 반론으로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드는 경우가 많은데, 역으로 우리 조상들이 예수가 설파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살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이름을 믿는다기보다 예수가 가르친 바대로 살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다. 예수의 이웃사랑에서 이웃은 우리가 아는 이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처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해당한다.
 
성경에 강도를 당해 길에 쓰러져 있는 낯선 사람을 구해준 사마리아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통에서는 그런 이웃사랑의 실천자보다는 효도를 잘한다거나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여겨왔다. 착한 사람에 대한 가치 기준이 다른 것.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이 과연 아무도 없다고는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뚜렷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의식하고 조직적으로 실천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현재에도 한국이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듣고 있다는 것은 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는 한국사회의 징표가 아닐까 싶다. 여기에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제도 크다. 한국그리스도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예수의 이웃사랑 실천보다는 교회에 가느냐 믿는다고 맹세하느냐 헌금하느냐의 표피적인 문제에 상당히 치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도 현재 한국사회의 교육시설이나 복지시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 계통의 공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너무 매도할 수는 없을 것.
요컨대,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는가?라는 질문은 확대하면 이웃사랑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불교에는 무연자비라고 해서 이 가르침과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흥미롭다.

어떤 종교가 전파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일 것. 무지도 죄라는 말은 심각한 말이다. 여기서 무지냐 앎이냐는 그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는 다시 올바른 게 무언지를 아는 사람이 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더 복잡해진다. 많은 범죄자들이 자신의 범죄의 참담한 결과를 알았더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범죄예방교육의 중요성이 있다.
 
무지는 적극적 차원의 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어도 소극적 차원에서의 죄다. 현재 실업자 문제가 심각한데 재취업교육이 있다. 재취업교육을 게을리하고 실업자 수당만 계속 타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 계발을 하고 꾸준히 평생교육에 임할 의무와 책임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여기서 무지와 앎의 문제는 그저 지식이 많으냐 적으냐보다는 삶의 실천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 것. 예수도 죽음 직전에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자기들이 하는 짓의 의미를 모르기때문에 용서받아야 한다면 - 예수를 죽인 죄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나 혹은 하느님 자신이라고 한다면 가장 큰 죄일 것. - 다른 어느 죄가 용서받지 못하겠는가?
 
그러면 이 세상에 용서못할 죄가 없을 것. 그러면 지옥도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논리적 결론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 그러면 아무 죄나 마구 지어도 될까? 용서받더라도 죄는 죄일 것. 용서받는다고 죄짓는 사람은 약이 있다고 해서 마구 병에 걸릴 짓을 하는 사람과 다름없다고 일본의 유명한 스님인 신란이란 분이 말했다.

신의 역사 개관(?) (류제동)
오늘날 보편적 유일신 개념이 태초에 있다가 다신 개념이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다신 사상에서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해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대개 보편적 유일신 개념이 고도의 추상적 개념이라는 점에서 발전된 후기의 개념이라고 추정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 내지 하느님으로 부르는 존재는 오늘날 학계에서는 다소 유대역사의 초창기에는 유대민족의 신에 한정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후에 바빌로니아나 앗시리아와의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보편적 신으로서의 위치가 뚜렷해지고 그러한 사상이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보편적 신 개념의 형성은 유대인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준다.

보편적 신 개념이 형성되기 전에는 부족마다 자기 부족의 신을 경배했는데, 자기 민족이 패배하면 자기들의 신도 함께 패배한 것으로 여겼다. 우리나라에서 국가와 유사한 개념으로 쓰는 종묘사직에서 종묘는 왕의 조상을 상징하고 사는 그 영토의 신을, 직은 곡식의 신을 상징한다. 이러한 신들이 국가를 수호한다고 생각하는 것.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를 무너뜨리면 종묘사직도 없애거나 그 지위를 강등시키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일반적 관행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은 자기들의 신 야훼가 유대인만의 신이 아니라 모든 인류, 나아가 모든 존재의 신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도출해낸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이 보편적 사고를 발달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 사고로 유명한 두 민족이 그리스 민족과 아울러 유대민족으로 꼽히게 되는 것도 이러한 사고의 전환에서 유래한다.

보편적 사고가 중요한 이유는, 유대민족이 전쟁에서 졌을 때 그저 패배하였다기보다는 보편적 신의 관점에서 자기들의 위치를 상대화해서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하느님이 유대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과, 유대민족이 하느님의 계율에 따라 살지 않으면 하느님의 벌을 받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음을 가르친다. 곧, 유대인들은 어떤 안 좋은 일이 자신들에게 미쳤을 때 운이 나쁘다거나 자기들의 신이 힘이 없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반성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곧, 합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 또한 야훼가 전지전능하다는 점에서 다른 신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자연이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떨치게 된다. 모험정신의 발전과 근대 유럽의 아메리카 진출과 아울러 세계 전역에의 확장도 여기에서 근거를 얻을 수 있다. 어느 곳이든 하느님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에 겁내지 않고 모험을 할 수 있는 것
 
. 다른 예를 든다면, 산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광산개발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면 산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광산개발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입.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빨리 퍼진 이유도 잡귀 잡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세계사상 최초로 직선적인 발전적 역사관이 형성되고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념이 형성되는 것.

그리고,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오히려 유일신 사상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어 왔다. 이집트는 다신교가 주류이지만,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의 왕 아멘호텝이 아케나톤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바꾸면서 아톤신을 유일신으로 섬기고 아멘신을 섬기는 사제들을 권좌에서 축출하는 개혁을 단행한 적이 있는데, 이 개혁이 인류사상 최초의 유일신 운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그 의의가 과연 유일신사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그 사상이 과연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을까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하나의 신을 공동으로 섬기는 민족적 자각을 이루어낸 것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당시 모세가 야훼를 섬길 것을 주장하면서부터라고 추정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그 야훼가 부족신을 넘어서 보편신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은 바빌론에 다수의 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가면서 예언자들을 주로 하는 지성인들의 반성적이고 보편적인 사고에 기인한다고 추정된다.

이런 유대인의 보편신 개념이 유대인을 넘어 확산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사도 바울로의 기여가 크다고 할 수도 있다. 유대교 자체도 폐쇄적인 민족종교는 아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려면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계율을 지켜야 한다. 동양의 유교를 신봉하려면 제사를 비롯해서 다양한 예의범절을 준수해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유대교의 보편사상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확산에 지장을 주었다.
 
 예수의 사상은 보편신 개념보다는 율법의 세목에 대한 준수보다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다소 추상적이면서 실천하기 쉽다고 할 수 있는 덕목을 주장한 데 특성이 있다. 이러한 예수의 사상이 사도 바울로를 통해 유대인의 세계밖의 이방 세계로 확산되어나가게 된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유대적 관습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도 바울로는 과감하게 유대적 관습을 넘어서는 포용성을 갖고 이방인들을 전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유대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은 희랍의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신 개념과 만나면서 더욱더 보편적인 사상으로 발전하고 당시 지중해 지역에 널리 설득력을 얻으면서 확산되어간다. 곧, 희랍사상이 없이는 기독교의 사상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유대 전통과 희랍 전통의 혼융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유일신 사상은 유대교와 이슬람에서는 다소 충실하게 이어지지만,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사상이 출현함으로써 다소 순수하지않은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삼위일체 사상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사상이고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지만, 대세인 것은 사실이지요.

중동지역의 문제에 관하여...(류제동)
근대 이전의 중동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이동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국경선이라는 개념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겠지요. 유목민족의 특성상 부족적 구별은 다소 뚜렷하지만, 중동지역은 인종 구성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형태를 보이는 지역 중 하나입니다. 주요 인종은 셈족, 아리아족, 우랄알타이족이고, 셈족에는 아랍인, 시리아인, 유대인이 있고, 아리아족에는 이란인과 아프간족이 있고, 우랄알타이족은 터키족으로 대표됩니다.

 

중동은 유사 이래로 '중동을 다스리면 세계를 다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중동지역은 역사의 전개에 따라 계속해서 이합집산을 거듭해왔습니다. 특히 중요한 최초의 사건이라면, 당연히 무하마드에 의한 이슬람교일 것입니다. 무하마드는 이슬람교에 의해 그 이전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랍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아랍인 이외의 종족이나 인종도 포용하는 거대한 이슬람문명권을 이룩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무하마드 이후에 이슬람제국은 팽창을 계속했고, 몽골의 침입이나 투르크족의 침입도 오히려 침입부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함으로써 이슬람교는 거듭 확산되어갔습니다.


너무 복잡해서 중간 역사를 생략하고 말한다면, 최후의 통일왕조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입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은 이슬람권의 종주국의 지위를 서구열강의 침입 이전까지 누렸고 대부분의 중동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제국이 멸망하고 제국의 영토는 서구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되어갔습니다.

 

서구 열강의 분할 점령과 식민지화는 원래부터 있어왔던 부족구성의 다양성과 함께 중동지역의 제2차세계대전 후에 중동지역이 형식적 독립을 이룬 후에 국경분쟁 등의 불씨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밖의 요소로는 이슬람 내 시아 파와 순니파의 대립의식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쿠웨이트와 이라크는 고대로부터 같은 행정구역에 속했고, 아랍민족이고 이슬람국가로서 공통의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쿠웨이트는 1899년 그 지역의 행정을 맡고 있던 족장이 영 제국주의의 보호를 받아들였고, 1961년에 영국의 보호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이라크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쿠웨이트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거나 침공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는 이라크측의 주장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측에 의하면, 쿠웨이트는 당시 1일 생산 쿼터량이 150만 배럴임에도 불구하고 50만 배럴이나 초과생산함으로써 유가를 배럴당 20달러에서 13달러로 폭락하게 하였고, 쿠웨이트가 이라크 영토내에 매장되어 있는 24억 달러어치의 석유를 불법채굴함으로써 이라크 및 전체 산유국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위의 이유외에 구체적으로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는 미국의 오판유도설도 있습니다. 미국이 후세인이 전쟁을 일으켜도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함으로써,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후세인을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렇게 전쟁을 부추긴 것은 미국 산업자체가 군산복합체여서 지구상에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야 미국산업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핵무기 개발등으로 미국에 다소의 위협이 되고 있던 이라크에 대한 응징의 구실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논리는 1950년 북한의 남침에 대해서 적용되기도 합니다. 북한이 오판하도록 조장하였다는 것이지요.


같은 아랍국가들도 여러 이유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시리아, 오만, 카타르, 바레인, 아랍 에미리트 연합 등은 미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요르단과 예멘은 이라크를 지지했습니다. 예멘은 아래에 설명되는 것처럼 이러한 태도 때문에 나중에 곤욕을 치룹니다.


현재의 아랍국가들은 이란, 이집트, 이라크 등 큰 나라들은 아랍에서의 패권을 먼저 장악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있는 추세이고, 작은 나라들은 그 큰 나라들이나 서방세력 중에서 의지할 만한 세력을 추종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큰 나라들은 이라크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해 호의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 자체와 달리 일반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후세인이 아랍의 자존심을 세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환호를 보내기도 합니다.


예컨대, 예멘 공화국의 태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예멘공화국은 1990∼91년의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입장을 지지하고 미군을 위시한 다국적군의 대(對)이라크 응징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미국의 원조가 급감하였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예멘인에 대한 사증 면제, 경제활동 자유 등 우대 조치를 중지하고 예멘인들의 취업입국을 규제하고 외교관 50명을 출국시켰으며, 약 80만 명의 예멘인 노동자들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과의 국경 확정 문제로 계속 대립하고 있다. 예멘은 걸프전 중 취한 아랍세계와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93년 6 ·7월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등을 방문했지만 관계 개선의 전망은 불투명하다.


(이 글은 DBDIC.COM에서 njin 회원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올렸던 글입니다.오름 출판사에서 나온 손주영 외 저 '중동의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불교(류제동)


4월은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이러한 달을 마감하면서 불교와 민주주의에 대하여 재고해본다. 불교는 그 탄생기부터 어떠한 권위에 의한 독단을 거부해왔다. 부처님이 진리를 발견하고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선포할 때에도 그냥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진리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맹목적인 믿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건전한 믿음만이 올바른 삶을 보장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정신이다.

 

이러한 기본정신은 불교 교단이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전체 구성원의 합리적인 토론을 통하여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으로 이어져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부처님이 인도에서는 독특하게 공화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부족 국가 출신이었다는 데에서도 그 한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왕자로 출생하였다고는 하지만 그의 부족인 샤키야족은 중요한 일을 왕의 독단이 아니라 전체 인민의 공동토론에 의하여 처리하는 전통을 이어왔다.


이러한 전통은 부처님에 의하여 시작된 출가공동체에도 이어졌다. 곧 부처님은 자신이 출가 공동체의 우두머리라는 권위의식을 주장하지 않았다. 계율을 제정할 때에도 출가한 스님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정당성을 갖는 계율이 세워지도록 했다. 특히 데바닷타라는 어리석은 제자가 자신을 부처님의 후계자로 지명해달라고 청하였을 때 부처님이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은 출가 공동체를 어떠한 한 명의 지도자가 이끌어간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입멸한 후 불교 교단은 어떤 하나의 구심점을 갖고 이어지기 보다는 다양한 분파가 형성되면서 다면적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민주적 사고는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에도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불교에서는 개인의 주체적 삶을 극히 중시한다. 선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지하여 종속적으로 사는 삶은 본연의 인간적 삶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물론 근대 이전의 불교는 민주화에 있어 일정한 한계를 갖는다. 원론적으로는 계급제도를 부정하면서도 계급제도의 현실적인 타파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불교의 역사적 한계라고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한계는 근대 이전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한계이다. 또한 오늘날에도 출가한 승려와 재가 신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는 새롭게 고민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문제는 출가주의적 종교라는 불교의 특징적인 면모에 대한 재고까지 요구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변화에 걸맞는 불교의 환골탈태를 심각하게 고려할 것을 요청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원론적인 면에서 출가와 재가의 차별을 불인정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와 민주주의가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리라는 것은 낙관해서 좋을 것이다. 한 예로, 오늘날 인도에서도 불교 부흥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인도의 지배적 종교인 힌두교가 계급차별의 비민주적 요소를 청산하기가 다소 어렵다는 점에서, 불교의 부흥은 인도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점이 클 것이다.
(이 글은 우리신학연구소의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이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우리신학 연구소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종교와 토착화 -교리와 의례를 중심으로-
by 진철승 /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들어가는 글

현대 한국사회에서 종교집단의 사회적 영향력은 다른 어떤 단일집단보다 강력하다. 전체 인구의 50% 남짓한 숫자가 종교를 믿고 있으며, 이러한 신자 집단의 힘과 자체적인 조직력을 바탕으로 종교는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도 종종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그러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는 아니지만, 정치권력이나 이해당사자들이 이들의 조력 내지는 조정을 요청하게 되거나, 아니면 이들을 견제 혹은 통제하는 등의 여러 방식으로 그러한 이슈들과 관계를 맺는다.


또한 이들의 사상(敎學, 神學)은 가장 근본적인 인간 삶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그 독단(도그마)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뿐 아니라 지성계의 주요 탐구대상이 되고 있다. 이외에도 이들의 경제적(종교자금과 토지) 힘은 세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세계에 유례없는 다종교상황의 한국사회에서 이들의 사회적(정치적), 사상적, 경제적 영향력의 총량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같은 영향력에 걸맞는 '문화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문화란 신앙양식, 생활의례, 사회복지에의 기여와 헌신의 자세, 예술적 창조에의 기여 등을 말한다. 몇몇 종교에서는 이런 아이템 중의 한둘에 남다른 기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종교 전체로 놓고 볼 때는 응당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신앙은 지나치게 개인적 기복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폐쇄적이고 전투적인 경우가 많다.


생활의례는 일반 대중이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 겪는 특별한 사건이나 시기에 치르는 의례적 행위체계(평생의례나 세시의례 등)이지만 이에 대한 종교계의 관심은 기이할 정도로 낮다. 기부문화와 자원봉사는 일정한 궤도에 오른 사회에서는 일상화되어야 하지만, 그를 권장해야 할 종교계에서 시주와 헌금이 사회복지로 回向되는 비율은 극히 낮다. 예술적 창조는 사상과 신앙의 현대적 재해석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양식의 창조로까지 나아가야 하지만, 외형적인 대형 건조물의 건립에 치중하거나 전통의 단순한 보존과 복제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여러 종교가 '지금 현재' 한국인의 문화적 삶과 의외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근대화, 도시화, 지식정보화, 그리고 脫근대화에 이르기까지 현대 한국인의 삶은 급격한 변동을 겪고 있으나 이에 대한 종교계의 대응이나 대안 모색은 매우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전래 시기의 길고 짧음을 막론하고 현재 한국의 종교들은 일반대중의 삶과 밀착되어 있지 못하다. 여러 종교가 경쟁을 벌이는 多宗敎 상황이라는 특수성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각 종교가 자기 중심의 선교와 內向에 머물며 일반대중의 구체적 삶과 만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는 탓이다.


현재 한국 각 종교의 신자증가율은 마이너스로 전환된 지 오래며, '無宗敎 대중'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은 문화재로서의 종교시설을 관람하거나 길거리에서의 치졸한 선교쇼를 강제로 관람하거나, 아니면 각 종교집단의 폭력적인 내부분규를 시청하고 있다. 자신들의 일상사와 더부는 종교의 모습을 쉽게 찾아보기 힘든 형편인 것이다. 소위 세계종교, 혹은 고전종교가 이 땅에 유입된 지 1천5백여 년 이상이 경과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문화적 접변 현상이 있어 오늘날 전통문화의 골간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나, 현재 이 땅의 종교들은 새로운 문화의 형성이라는 과제와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이고 있다.


'외래종교'가 어떤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표면적이든 잠복적이든 그 사회의 여러 문화양식과 충돌하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그와 타협하게 된다. 그러한 타협의 과정을 토착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나, 타협의 내용은 종교의 본질적인 성격이나 전파과정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사회에서 외래종교라 하면 멀리는 삼국시대에 유입된 불교와 도교 및 고려 말 이후 유입된 성리학(이전의 유교, 혹은 유학 일반은 종교적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200여 년 전 이후 유입된 가톨릭과 개신교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그 유입 시기나 과정 및 내용이 상이하기에 한국문화와의 충돌이나 타협의 방식과 내용이 상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1백여 년 전부터 시작된 서구문명의 침입과 그에서 비롯된 소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이들 종교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주도적 종교로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세계종교사상 유례가 드문 '다종교 상황'을 연출하며 한국사회의 심층부에까지 뿌리내리고 있고, 그 전체적 영향력은 그 어떤 단위집단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이들의 문화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인데, 이는 이들 종교의 선교방식과 토착화의 방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들 여러 종교가 토착화되는 과정과 현황을 '교리'와 '의례'의 두 척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의례 토착화의 여러 사례 중 일반 대중의 일상 삶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평생의례, 그 중에서도 '혼례, 상례, 제례'에 대한 각 종교의 대응양상과 대중의 수용양상을 비교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각 종교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정도로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각 종교의 문화적 영향력이나 토착화 방향의 전체상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敎理, 思想의 토착화


'土着化'에 대해서는 사전에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토착'에 대한 정의로서 그 일반적인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토착은 일반적으로 "여러 대를 지방에서 살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생물이) 어떤 곳에 침입하여 그곳에 정주함"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토착종교'란 한국에서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는 종교를 의미하겠고, '종교의 토착화'란 '외래종교'가 한국에 침입하여 한국에 정주하게 된 상황과 그 과정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더 넓게 본다면 단순한 생존의 차원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종교적 상황과 대면하고 갈등을 빚으면서도 나름대로 한국적 종교문화 토양에 뿌리내리는 과정이 바로 토착화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는 다양한 양상이 전개되는데, 자신의 '교리'와 '의례'를 변형시키지 않고 고집하며 해당 지역에 강요하는 양상이 그 하나요, 교리 및 의례를 해당 지역의 토착적 종교문화에 맞게 변형시키거나 독자적인 사상과 의례로 발달시키는 것이 그 둘째라 하겠다. 첫째 유형에는 유입된 지 100∼200년밖에 되지 않았고, 해외 선교본부의 절대적 통제에 놓여 있었던 기독교가 해당될 것이고, 둘째 유형에는 신라-고려조의 불교와 조선조의 유교를 들 수 있겠다. 물론 이 두 방향 사이에는 무수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단순화시키면 이러한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토착화의 정도나 방향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교리"와 "의례"의 두 요소만을 살펴보는 것은 단순화의 위험이 있으나, 큰 역사적 흐름을 개관하는 데는 나름대로 효용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교리"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는 신라-고려 시기의 불교와 조선 시기의 유교를 꼽을 수 있다. 신라-고려 시기의 불교는 사상가이자 종교적 실천가였던 걸출한 두 인물을 낳았다. 원효와 지눌이 그들이다. 원효는 중국을 통해 유입된 잡다한 불교 교리와 경전을 두루 會通회통하여 나름의 敎相判釋교상판석을 함으로써 해동성자의 칭송을 받았으며, 지눌은 신라 하대 이래 전승된 선종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기존의 교학과 조화를 이루어 독자적인 禪敎融攝선교융섭의 수행체계를 정립하였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적인 불교사상과 수행은 이들 사상과 수행체계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그 기틀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려말 이전 유교는 종교로서의 기능보다는 經世와 學文의 수단으로서 역할했다고 할 수 있다. 유교가 보다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한국사회의 종교문화와 대면한 것은 조선조에 들어서이다. 더구나 남송 鄕伸향신들의 이데올로기와 생활습속을 대변하는 주자의 성리학은 중국에서는 원명기를 거치며 쇠락해갔으나, 조선에서는 매우 독자적인 '조선성리학'으로 꽃피었다. 퇴계 이황을 필두로 하는 조선 중기 이래의 조선 성리학자들은 치열한 논쟁과 사상적 천착을 통해 성리학의 사상적 진일보를 이루었다.
신라-고려(중세1기)와 조선(중세2기)에서 이처럼 불교와 유교가 발생지역의 사상적 수준이나 도그마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는 세계종교사 상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한국적 사상의 세계화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단적으로 원효와 퇴계는 오늘날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여러 국

 

제연구단체가 조직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단지 과거의 사상적 유산일 뿐이고 오늘날 한국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수준이나 위상은 과거에 비해 매우 낮은 것이 현실이다. 이는 불교나 유교 공히 19세기말 전근대사회의 해체 과정에서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후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지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원인일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불교나 유교에 비해 토착화라는 명제는 훨씬 큰 비중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나, 그 필요성에 비해 敎界 내의 관심이나 노력은 활발하지 못한 형편이다. 기독교는 과학기술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는 소위 서구문명의 식민지 침탈 과정에서 한국에 유입되었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에 비해 훨씬 큰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한 토착화 작업이 절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선교 방법이나 전략에 따라 한국 내의 독자적 敎區 설정이나 司祭 및 신학자의 양성이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던 탓에 한국적 신학이나 사상의 형성은 요원한 일이었다.


가톨릭의 경우 초기 유학자들에 의한 자생적 西學 공부와 기독교 교리 이해를 토착화의 선구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으나, 이는 가톨릭 내의 護敎論的 의견일 뿐이고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공히 토착화라는 주제에 공식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이를 신학적 주제로 삼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이는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4)의 결정 및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 세계조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활동과 다양한 신학 조류의 유입, 그리고 막 산업화의 과정에 들어가기 시작한 한국 국내의 사정에 힘입은 것이었다.


개신교계에서는 1960∼70년대의 민족문화부흥운동(박정희정권에 의해 조장된 관변적인 측면이 많지만)과 연동하여 신학의 토착화와 관련한 논의가 무성하였고 논쟁도 가열되었다. 1960년 전후하여 이루어진 신학의 토착화 논의는 채필근("동양사상과 그리스도," 《기독교사상》, 1958. 1∼2), 장병일("단군신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 《기독교사상》, 1961, 12 / "유형학적 입장에서 본 기독교와 샤머니즘," 《기독교사상》, 1961, 6), 유동식("복음의 토착화와 한국에 있어서의 선교적 과제," 《감신학보》, 1962), 윤성범("한국 재발견에 대한 단상," 《기독교사상》, 1963, 3 / "환인 환웅 환검은 곧 하나님이다," 《사상계》, 1963, 5) 등이 주도했으며, 이후 1970∼80년대의 민중신학으로 이어졌다. 개신교계 토착화 논의는 위 관련 논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양사상, 한국의 기원신화, 무속 등 기층신앙과 기독교 신학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사회적 관심은 불러일으켰지만 보수적인 주류 개신교 진영의 무반응과 홀시에 따라 70년대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민중신학은 일종의 사회신학으로서 1970∼80년대의 엄혹한 사회현실에 대한 대응신학이자 실천운동의 결과물로서 한때 세계신학계의 주목을 받는 등 '한국적 신학'의 성립을 기대하게 하였으나, 이 또한 1990년대 이후 전면적인 사회구성의 변화와 기독교계의 보수회귀 경향에 따라 약화되었다. 이같은 진보적 혹은 대화지향의 개신교계 신학 흐름은 20세기 후반 이래 탈근대화 사회 및 지식정보화사회로의 진입에 따라 여성신학, 생명신학, 물의 신학 등 새로운 주제별 신학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또 예수교장로회(예장)로 대표되는 한국 개신교의 주류 세력은 여전히 180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일었던 대각성운동과 이후 형성된 근본주의fundamentalism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무한대의 확장선교와 보수적인 聖經無誤謬說성경무오류설의 길을 가고 있으며, 당연히 이들에게서는 한국적 신학의 형성과 발전은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가톨릭에서는 초기 수용과정에서의 자발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는 시대적 상황의 결과물일 뿐이고, 2백여 년 가톨릭의 실상은 철저한 파리外邦傳敎會외방전교회와 로마가톨릭의 통제였다. 이는 조선 후기 1백여 년의 참혹한 탄압을 경험한 가톨릭계의 소극성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이었다. 일제하에서는 조선 교구의 유지를 위해 일제의 무단 통치를 묵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는 모든 전례미사가 라틴어로 이루어졌으며, 신학의 토착화란 주제는 가톨릭 내부에서는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독자적인 교계 제도가 설정되고, 점차 미사 경문의 한글화와 한글말 전례 집전 등이 확산되면서 가톨릭 내부에서도 서서히 토착화의 움직임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가톨릭 내부의 토착화 운동은 매우 점진적인 것이어서 외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상당한 정도로 깊이있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7년 설립된 한국사목연구소의 "토착화 연구위원회"의 활동인데, 전례, 영성, 교리교육, 복음선교, 신관, 인간관, 공동체관 등 7가지 주제로 꾸준히 발표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사목》(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발표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 고유의 종교 문화 전통과의 심도있는 대화를 강조하며 문화신학적 토착화 운동을 펼치는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1991년 창립) 등이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아직은 타종교, 특히 한국종교 및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은 60년대 이래의 활발한 사회선교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아직 '신학적으로' 서구 가톨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및 인도 등지의 자주적 신학의 형성이나 전례의 토착화 등과 비교해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나마 한국 가톨릭계의 토착화 노력 중에 두드러지는 부분은 전례의 토착화 시도라고 할 수 있으나, 이도 소수 실천적인 사제나 신도집단에서만 볼 수 있을 뿐 교계의 대부분은 이에 무관심한 형편이다.

 

가톨릭에 '한국적' 신학의 구축을 요구하는 것은 가톨릭의 엄격한 위계제도에 비추어 무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가톨릭이 한국에서 존재하는 한 이는 필수적인 과제일 것이고, 이 과제풀이에 헌신하는 다양한 흐름이 내적으로 약동하는 한 한국 가톨릭의 신학적 갱생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21세기를 맞는 지금 한국사회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종교계가 새 세기를 맞는 나름의 방책을 제시하거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유교와 불교는 과거의 빼어난 사상적 성과를 반추만 하면서 안주하고 있고, 개신교나 가톨릭이 조만간 독자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교리와 신학을 형성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형편이다. 19세기 이래 일반적인 '사상'과 '종교 교리'와는 구별이 되고 있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삶에 대한 성찰과 비전 제시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종교계의 치열한 사상적 고투는 그 종교 자체로는 새로운 교리신학적 성숙을 꾀할 수 있을 것이고, 더 넓게는 새로운 세기, 새로운 삶의 양식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다종교상황'과 '동서문명의 접전장'이자 '압축성장'의 길을 가면서 수많은 인간 삶의 문제들을 동시에 안고 있는 한국사회는 인간 삶의 많은 본질적 문제에 대해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양도 비옥하고 씨앗도 있으나 한국종교계는 새로운 사상적 열매를 맺는 데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책임방기일 것이고, 그러한 무책임이 오래 간다면 한국사회에서의 종교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심각한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 함석헌옹이나 다석 유영모 선생 및 여러 개별적 사상가들에 의해 독자적인 사상체계가 제시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제도종교 자체의 질적 변화이다.


답답한 종교들의 세계

이 찬 수 (한양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우리 사회를 묶어주는 통합원리는 과연 있는가? 없다고까지 하기는 힘들어도, 딱히 이것이라고 지적할만한 것을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어떤 사회든 하나의 원리에 묶인 획일적인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적어도 구성원 대다수가 공감하는 고유의 것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을 쉽사리 찾기 힘들다.

 

사분오열된 개개집단 중심주의가 두드러질 뿐, 전체에 적용되는 긍정적 공감대가 보이지 않는다. 어느 사회든 문화적 공감대, 사회통합의 기능을 해온 것은 종교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우리나라 종교에서 그런 것을 찾기는 힘들다. 특별히 200여년 전 서구문명을 등에 업은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이래 오늘까지 우리나라는 동양과 서양,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인 채 문화적 구심점, 정신적 지주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것이 들어와 있을만큼 개방적인듯 하지만, 내부적으로 이것들은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채 그저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다. 무언가 창조되지 못하고 혼재해 있을 뿐인 것이다.


그저 혼재해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갈등하고 대립한다. 종교의 세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극에 달한다. 자신과 다른 것을 거의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일체를 자기중심적으로만 본다. 상호 이해는 고사하고, 외면하거나 경시하거나 배타하는 수준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서양에서 들어온 그리스도교(가톨릭 + 개신교)는 아직 우리 사회와 문화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면서도, 어느새 민족의 주인인 양 착각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우리의 전통 종교와 문화를 경시하거나 배타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유교, 불교 등 전통 종교는 지나치게 아성만을 쌓고 그 속에 안주한다. 우리 사회에 주도적인 세력을 형성해가고 있는 서양문명, 그 문명을 등에 업고 있는 그리스도교와 자신있게 접촉하고 수용하기 보다는 무관심하거나 외면한다. 때로는 그 도도한 세력 앞에 위축된 채,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기 급급하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에서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와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종교는 언제나 따로 논다. 늘 자기중심주의, 자기집단우월주의, 더 나아가 호교론적 배타주의 마저 횡행하는 형편이다.


유독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이 강한 한국 사회 속에서 종교는 한술 더 떠 종파, 신분까지 보탠다. 자기 종파, 특정 신분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령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부나 목사가 아니면 교단 안에서 중요한 일을 거의 하지 못한다. 자기 종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애당초부터 무관심하도록 틀지어져 있다. 자기 집단용 철옹성만을 쌓고서 대화 보다는 무관심으로, 다원주의 보다는 배타주의 내지는 자기우월주의로, 이타주의 보다는 이기주의로 무장한다. 대화한다면서 외교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자기 집단 안으로 돌아서는 순간 호교적인 태도로 바뀐다. 이타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와 같은 것이 판을 친다. 서로를 이해하고 긍정하는 분위기는 제도적 종교 안으로 들어갈수록 찾기 힘들다. 무엇이 그러게 만드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종교들의 자기중심적 보편성


무릇 어떤 종교이든 보편성을 주장한다. 자신들의 가르침은 일부에만 적용되는 편협한 것이라고 보는 종교인들은 없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유교든, 천도교든 원불교든 증산교든, 적어도 '교리' 차원에서 보면 대부분 포용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의 가르침은 전 우주에 적용되고 또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모두가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지, 일부에만 적용되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가령 불교에서는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 말하고,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라 한다. 부처님의 성품은 불자에게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에게 있다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원천적으로 부처이거나 적어도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신분이나 종파가 따로 없다. 누구나 본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은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며",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Immanuel)고도 말한다

 

. 이러한 가르침 역시 일체의 종파간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원천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이다. 천도교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등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天主)을 모시고 있고, 따라서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것이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진리인 일원(一圓)은 법신불이며, 다름아닌 일체 중생의 본성이다. 그러니 사람을 섬기되 하늘처럼 섬기고(事人如天), 부처님 대하듯 해야 한다는 종교 윤리도 나오게 된다.


이것은 얼마나 깊은 자비와 생명의 가르침인가? 종교인들이 이대로만 살면 이 세상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서방정토, 극락은 더 이상 저 먼 곳에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 종교인 수가 전체 인구수를 능가하는 현실 속에서도 사회적 무질서는 여전하다. 조화와 평화 보다는 다툼과 알력, 긴장이 더 많다.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물신숭배가 횡행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종교들에서 아무리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랑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해도, 정작 종교인들은 그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생겨난다. 원천적으로는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사실이라고 해도 그러한 진리에 대한 열쇠는 자기가 쥐고 있다는 자기중심적 태도를 취하는 데서 비롯된다. 말하는 자가 자기중심적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듣는 자도 자기의 지평 안에서만 받아들인다. 가령 불교에서 아무리 "일체 중생에 불성이 있다"고 선포한다 해도 그것을 듣는 타종교인은 불교적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기 식대로 오해한다.

 

그리고는 "불성이라니? 신성이라면 몰라도!" 하는 식의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일체중생실유불성"이 신분이나 종파를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원천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인 것은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저 불교적 입장에서의 사실에 그치고 말 뿐, 다른 종교인들마저 동의하는 보편적 진리가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느님의 형상을 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 하고,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때의 '우리'란 그리스도인에 제한된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해석을 한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무조건적' 은총이라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인간은 여러 가지 조건들을 달아놓는다. 여러 걸음 양보하여 신실한 타종교인들을 "하느님의 자녀" 혹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때 조차도, 그들이 자기 편으로 오는 것이 옳다는 차원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신다면서도,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는 그리스도교 중심적 조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결국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그리스도교 중심적' 사실로 제한시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종교인들이 다른 종교적 진리를 그 자체로 긍정하기 보다는 자기 종교의 진리로 흡수하는 차원에서 인정하기 때문이다. 불자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여러 신들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교인은 부처님을 그저 뛰어난 하나의 인간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다른 종교를 존중한다며 백번 양보하여 "모든 종교는 다 옳아!" 하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자기중심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이고, 자기중심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고 이해해버릴 뿐이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한다 해도, 아무리 인간은 하늘을 모시고 있는 하늘과 같은 존재(侍天主, 人乃天)라 해도, 그 원칙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에게만 "마음이 곧 부처"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명제가 타당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적인 종교의 세계에서 보편적인 판단, 보편적인 잣대란 없다는 말이 된다. 내가 남을 판단하는 그만큼, 동일한 이유로 남도 나를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보편성을 주장한다. 자기들의 종교는 전 인류에, 전 우주에 통하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믿는다. 어떤 종교든 원칙적으로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좁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가령 가장 고전적 대승불교통론이라 할 수 있을 <대승기신론>에서 일체 중생의 "본래 깨달아 있음(本覺)"에 대해 말하는 것이나, 신약성서에서 "만물(萬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이다. 그렇지만 불자든 그리스도인이든 특정 전통 안에 속한 종교인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이것을 해석한다. 누구든지 자기들의 진리를 안다면 결국 자기 쪽으로 올 수 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바로 모든 종교들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만 보편성을 주장하는 까닭에, 보편성이라는 이름 하에 특수성간의 대립만 낳는 꼴이다. 종교들의 보편성 주장은 사실상 한번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는 '특수한' 주장들일 뿐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가르침과는 모순되게도, 현실적으로 가장 보편적이지 못한 곳이 바로 종교의 세계가 되고 말았다. 자기들의 진리는 전 우주에 통한다며 거창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너도 나도 거창한 말들을 하는 바람에, 실제로 그 거창함이 실현된 적은 없으며, 도리어 그 거창한 진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끼리끼리 놀기만 하는" 가장 속좁은 곳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3. 편협한 종교들의 세계


종교의 편협성을 반증하는 다른 식의 예를 들어보자. 문학이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만한 보편적인 것이 있게 마련이다. '보편적'이라고까지 말하기 힘들다면, 적어도 한 사회의 다수가 공감하는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가령 박경리나 이문열, 혹은 조정래의 소설을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덜 읽고 불자라 해서 더 읽는가? 비종교인이라 해서 좋아하고 종교인이라 해서 싫어하는가? 그렇지 않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더 읽고 덜 읽을 수는 있으나, 이들의 소설에 굳이 종교색까지 개입시키며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들 역시 특수 종교인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도 않는다. 그저 인간의 삶을 다룰 뿐이다. 독자 역시 필자에 대한 별 선입견 없이 이들의 글을 읽고 감동한다. 시도 마찬가지이고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읽기만 한다면 우리 사회의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을만한 요소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예술 분야에도 만인의 가슴을 울릴 멋진 음악, 미술, 춤이 있다. 김덕수패의 사물놀이 공연을 보면서 한국사람이라면 종파에 관계없이 모두들 신명을 느낀다.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그때만큼은 저것이 바로 우리의 소리로구나 공감한다.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이 느껴진다. 살풀이든 승무(僧舞)든, 하나의 예술로서라면, 얼마든지 감상하고 힘찬 박수도 보낸다. 조수미나 홍혜경의 노래를 들으면서 목소리 참 좋다고, 노래 정말 잘한다고 감탄한다.

 

이들의 음악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높은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괜시리 뿌듯해진다. 대중음악으로 가도 마찬가지이다. T.V.에서 각종 '쇼프로'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가족이나 친구끼리 부담없는 대화도 즐긴다.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나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부르고, 그 분위기에 취한다. 이들 노래를 불교인이라서 싫어하고 가톨릭 신자라 해서 좋아하는 경우는 없다. 절에 나가는 아이나 교회 나가는 아이나 대부분 서태지는 좋아한다. 신세대축에는 끼지도 못하는 나도 좋아하니까.


또 한국사람이라면 우리 소리를 다룬 영화 "서편제"를 보며 아스라이 회상에 잠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영화에서 우리 소리의 한(恨) 혹은 아픔을 읽어낸다. 이곳에 신분이나 종파란 따로 없다. 어느 학교든 국어, 역사를 가르치고, 수학이나 과학을 배운다. 설령 그 학교가 특정 종교적 이념을 가지고 설립한 학교라 해도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것이라면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도 입시 때문이든, 취업 때문이든 학교의 방침을 따르며 저마다 공부한다. 전국민이 열광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열기가 있는가 하면, 대선(大選) 철이라도 되면 절이나 교회 혹은 교당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달아오른다. 이런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데 신분이나 종파는 그다지 벽이 되지 않는다.


철학 분야도 그렇다. 가령 칸트는 서양철학자이지만 한국의 철학자에게도, 그리스도교권 철학자 뿐 아니라 불교권 철학자에게도 그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헤겔이나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한 두번쯤은 애쓰기도 한다. 이들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참 대단한 철학자들이라는 공감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퇴계나 율곡 같은 이 역시 전국민적인 위인이자 학자로 칭송받는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세종대학, 세종연구소, 남극 세종기지, 세종로 등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쓰는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구나 없으면 못사는 돈에도 세종대왕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최근에 소설가 이문열씨가 그동안 벌어들인 인세 수입을 털어 평생 숙원사업이었던 소설가 지망생을 위한 연수소를 개설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은 소설가를 배출하기 위한 작은 학교인 셈이다. 문인들 대부분이 반긴다는 전언이다. 그런데 종교의 세계에도 이런 것이 가능할까?
종교의 세계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가령 원효(元曉) 스님과 같은 분을 목사님들까지 존경하는 전국민적인 스승으로 받들 수 있게 될까? 부활절에 스님이나 교무님들까지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있게 될까?

 

다양한 종교인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타종교들에 대해 배우는 교육기관이 설립될 수 있을까? 타종교들에서 자기 종교적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될까?

4. 종파주의 - 종교라는 이름의 벽


현실적으로는 거의 힘들어 보인다. 왜인가? 역사적인 사실의 차원에서는 원효를 위인으로 받들 수 있지만, '종교'라는 안경을 끼고 '스님'으로서의 원효를 보는 순간, 특히 타종교인에게 그러한 보편성은 사라지거나 반감되고 만다. 원효 같은 분을 화폐에 새겨 기념하고자 하면 일부 그리스도교인이 반대한다고 한다. 원효를 민족의 스승으로 보기 보다는, 그저 '중'의 수준에 두는 몰지각함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인만을 탓할 것도 없다.

 

다른 종교의 상황을 보더라도 크게 다를 것을 없겠기 때문이다. 가령 그리스도교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교인이 부활이라는 '황당한' 사실을 믿는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예수를 신으로 섬기는 행위가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종교의 내적이고 보편적인 세계는 닫아두고, 또 그 진정한 의미는 알려 하지 않은 채, 그 외적이고 차별적인 측면만 보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이름 하에 서로를 가리는 거대한 울타리들만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인에게는 '스님'이나 불교적 사상가로서의 원효만 주로 보이고, 그리스도교와 같은 타종교인에게는 바로 그러한 측면만 잘 보이지 않는다. 원효를 총체적으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 그런 식이다. 불교인에게만 팔리는 책, 그리스도교인에게만 팔리는 책은 제법 있지만, 특정 종교의 제목을 달고서 그리스도교인과 불교인 모두에게 비슷한 양으로 팔리는 책은 거의 없다. 다른 제목으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으면 어느 정도 팔릴 수 있지만, 제목부터 특정 종단에 상응하는 말이 들어가면 일반 독자들의 손에는 아예 들어가기조차 힘들다. 불교의 이름을 단 책이 그리스도인의 손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이름을 단 책이 불자들의 손에 들어가기 힘들기도 매한가지이다.


이 뿐 아니다. 같은 그리스도교 전통이라면서도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자기 종파 안에서만 대화가 된다. '신학'이라 하지만,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은 다르다고들 생각한다. 특히 자식뻘 되는 개신교인이 어미격되는 가톨릭에 대해 가지는 차별의 눈초리는 도를 넘는다. 개신교는 가톨릭을 심지어 이단 취급까지 한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가톨릭은 개신교를 서자(庶子) 취급한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가 한 수 위라는 심리적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가톨릭 계통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개신교인이라 할지라도 개신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없고, 개신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설령 가톨릭 신자라 해도 가톨릭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힘들다. 모두가 같은 경전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류의 구세주라 섬기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끼리끼리만 일을 도모하고, 정작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자기 사람만 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그 전형적인 모습은 종교 안에 다 들어있는 셈이다.


개신교 안으로 들어가면 또 종파라는 벽이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까지 개신교의 장로교 대학에서 신학 공부한 사람이 감리교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장로교 대학에서 공부한 장로교인이 감리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도대체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 무슨 교리상의 차이가 그렇게 심하단 말인가. 더욱이 일반 신자들이 느끼는 차이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편이 나뉜다. 의도적으로 편가르기를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으레 자기 교파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짜여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만일 자기 옆에 사람이 없으면 다른 편에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일을 포기해버리고 만다. 언제나 끼리끼리이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이 당연하다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이기를 멈춘다고. 예수는 그저 세 불리기 좋아하고 편가르기나 일삼는 바로 그곳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 다시 올 분이라고, 아니 다시 와야 한다고. 앞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난다면, 이러한 종파주의, 자기집단 중심주의를 뒤집음으로써 시작되고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개별 집단중심으로 나아가다 보니, 오로지 자기 교회, 자기 종파의 양적 성장에만 골몰할 뿐이다. 제대로 된 시설 하나 갖추지 않고, 능력도 없는 사람끼리 신학교를 세워서 삼류 목사를 양산해낸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대학 교육이 보편화되어 있고, 대학원 교육이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을 만큼 국민의 지적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데도, 1-2년 짜리 통신 신학교 같은 것을 만들어 쓱싹 목사를 만들어낸다.

 

장로교 안에만 100여개에 가까운 교파가 또 있으니, 그리고 이들 교파마다 자기 교회 안에 신학교를 두어 교파 신학을 가르치고 목사를 양성하는 지경이니, 이들이 과연 중생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람들인가? 우리의 영적 세계, 정신 구조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모두들 내면적인 종교의 세계는 닫아두고, 종교적 '재벌'이 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이다.


겉으로 보기에 가톨릭은 개신교와 같은 분파는 없지만, 이것은 겉으로일 뿐이다. 가톨릭에서는 사실상 교구가 개신교의 종파를 대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구 간의 벽은 종교간의 벽 못지 않게 높다. 같은 신부라도 다른 교구에서 '밥 빌어먹기'는 힘들다. 사제의 복장만 같을 뿐, 교구별로 내적 사제복은 이미 차별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마음의 문을 닫고 산다. 교구 간에 벽이 높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 중 하나가 교구별 신학대학 세우기이다.

 

굳이 대학까지는 필요없고 또 대학을 세우고 운영할 능력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데도 대학을 세우느라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상호 경쟁하다시피 한다. 기존 타교구 대학을 충분히 활용해도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작든 부실하든 '우리끼리 해먹는게 속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부 재교육이 필요하다거나 사제 양성을 위해서라면 다른 교구 대학에 위탁 교육을 하면 충분히 될 일을 가지고, '우리 것'에 집착하고 내가 좌우하려는 소유욕에 휩싸여 자기 것을 고집하느라 그러는 것이다.

 

땅덩어리나 넓고 지역간 차이도 워낙 커서 그런 것이라면 또 다른 문제이다. 가뜩이나 좁은 반도 땅에, 그것도 반쪽으로 나뉜 슬픔의 땅에서, 어차피 로마 신학을 정점으로 하면서 무슨 신학상의 차이도 전무하다시피 한데, 신부 지원자는 점점 감소하고, 우수한 학생을 뽑기도 힘든 상황인데도 말이다. 먼 앞날을 내다본 처사가 아니다. 모두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꼴이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이다.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대순진리회의 경우는 지나치게 종말론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다. 현실을 긍정하지 않고 '후천 세계'에만 집중하다보니, 다양한 모습으로 깊은 종교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현실의 다양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섬뜩한 표어를 내걸고 대다수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모는듯한 극단적 '예수쟁이들'이 무색하게, 우주적 진리의 근원자인 상제(上帝)를 역사적 인물인 증산에게만 가두어둔 채, 스스로 게토화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형제/자매 종단인 증산도와조차 조화하지 못한다. 증산도와 대순진리회는 모두 증산을 교조로 섬기는 한 종교의 두 종파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별종 대하듯 한다. '상생'(相生)이라는 증산의 가르침이 무색하게 이들은 상극(相剋)이다. 그러니 똑같은 증산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같은 세계관을 가지면서도 증산도인이 대순진리회 소속 대학의 교수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 그 이상이다.


불교 안으로 들어가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겉으로는 교파간 분열이 심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 속에는 또 문중 중심주의라는 것이 있다. 어느 문중에 속하느냐에 따라 내 편, 네 편 가른다. 의도적으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의도적으로 자기 문중 사람만 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힘없는 사람은 힘있는 문중, 유력 인사에 줄서기 급급하다. 이 마당에 나도 깨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온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소명은 순전히 개인의 근시안적이고 심리적인 위안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종교의 세계 안으로만 들어오면 다른 민족 이상의 차별이 생기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가령 가톨릭 대학에서 불교학과 신학을 공부한 개신교인이 있다 치자. 그는 겉으로는 종교간 화합과 일치의 상징처럼 비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 데서도 행세하지 못한다. 가톨릭 계통 대학에서는 개신교인이라 외면당하고, 개신교 계통 대학에서는 천주교 신학을 했다 해서 거절당한다.

 

불교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이라 하여 안중에 들지 못하고, 그리스도교 권에서는 불교를 공부했다 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물론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종파에 따라 약간의 태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그러는 것은 분명하다.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도 또 마찬가지이다. 학문이 학문인 한, 거기에는 보편적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특정인만을 위한 학문이 있던가? 인류의 구원을 도모하는 종교 세계의 학문이라면 더욱 더 보편성을 띠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 내부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령 신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진보다 보수다, 자유주의다 정통주의다 하여 또 '편싸움'이 있다. 같은 그리스도교 서점에 들어간다 해도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은 진보주의에 속한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의도적으로 거들떠 보지 않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쪽에는 아예 관심이 가지 않도록 머리 속에, 가슴 속에 이미 그렇게 입력되어 있다. 그런 책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같은 교단에 속했어도 신학적 입장이 다르면 완전히 남이 되어버리고 만다. 진보적 계열에 속한 사람은 보수적 계열에 속한 사람의 학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학문이라고 간주조차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분열을 생명으로 하는 개신교" 계통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사실 가톨릭에서도 다르지 않다. 현대성 내지는 포스트모던성을 반영하는 학문에는 어두울 뿐 아니라, 뿌리가 없다며 기피한다. 오로지 중세의 로마 신학만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위험시한다.
다 이런 식이다. 종교 연구를 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특정 종파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이고 내세워야 일거리가 생긴다. 불교 연구를 위해서는 간판 어딘가에 '불교'라는 이름이 들어가야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정받고 통한다. 당연히 대다수 타종교인에게는, 특히 배타적 성향이 강한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안 통한다. 그저 남 얘기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만다. 이런 식으로 '종교'자(字)만 들어가면 '벽'이 두터워진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파끼리 경쟁을 한다. 의도적인 경쟁은 아니라 해도, 이미 구조적으로 자기 종파 이야기만 하도록 되어 있다. 다른 종파, 다른 종교에는 그만큼 관심이 없다는 얘기다. 관심이 있다면 자기 종파에 이익이 될 때뿐이다. 그만큼 현실적 종교들의 세계에서는 보편성은 커녕 자기 중심적 특수성만 판을 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교적 우주관을 떠올리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을 떠올리는 등 대부분 자기 식의 종교관을 연상할 뿐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5. 신분 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종교의 문제점은 이 밖에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신분중심주의이다. 가령 가톨릭을 보자. 그 세계 안에서 신부와 평신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같은 수도자라 해도 신부와 수녀의 차이 역시 일반적인 상상 이상이다. 신부는 많은 경우 섬기는 자라기 보다는 섬김받는 특권층이다. 같은 수도자인데도 수녀는 봉사와 순명이라는 미명하에 신부가 하지 않는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대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은 세상에 와서 낮은 이를 섬기다 가신 분이라고 가르치면서, 이러한 예수를 따르려 신부가 되었다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이라기 보다는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신자들은 사제가 허드렛일을 못하도록 부추긴다. 그래서 처음 서원할 때의 결심과는 다르게 일단 신부복을 입게 되면 목이 굳어진다.


사제만 식자층이었던 서양의 중세 사회와 같은 시절이 아닌데도, 복종과 명령이 지배하는 봉건적 수직 사회가 아닌데도, 종교에서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평신도들이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전무했었다. 이제서야 평신도들도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천만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요원하다. 아무리 신학박사가 된다 한들, 그가 평신도인 한 제도권 교회 안에서는 쓰일 데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힘들다. 그저 당사자 스스로가 어렵사리 일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간혹 평신도가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찾다 찾다 그에 해당하는 신부가 없을 경우, 아주 특수한 분야에서일 뿐이다.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평신도가 어찌 거룩한 신부를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개신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신부든 목사든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서나 배워야 한다. 그것이 겸손한 자세가 아닌가? 그것이 예수가 그랬던 것과 같은 자기 비움의 자세가 아닌가? 신학은 이제 더 이상 사제나 목회자의 특권 학문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겸손이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으스댈 높은 자리 조차 만들지 않는데 있다.


물론 어떤 개인을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제도권 종교집단이라는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받들고 사제들은 누리도록 말이다. 스님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스님 역시 본래는 신자들의 공양으로 "빌어먹어야만 할" 존재이지만,(비구/비구니는 '빌어먹는 자'라는 뜻의 범어 '빅슈/빅슈니'의 음사이다.) 일단 승복을 입게 되면 다른 그 누구보다 가진 계층, 누리는 계층에 편입된다. 출가자들에게 도대체 부족할 것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출가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어떻게 사느냐와 상관없이 평생 삶이 보장되는 셈이다. 출가하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고, 그를 위한 실천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출가는 수행의 시작일 뿐이다. 끝없이 비워야 할 수행의 세계에서 애당초부터 쌓아놓고 시작하는 것은 첫 단추부터 어긋난 꼴이다. IMF 한파에 퇴직 걱정, 밥 걱정하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일단 출가하면 먹고 사는 것에는 별 걱정이 없으니 말이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근심 걱정을 초탈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능력있는 스님이라면 기도방이라는 명분 하에 개인 '토굴'을 챙기는 경우도 흔하다. 무소유는 커녕 사실상 이기적 축재(蓄財)인 셈이다.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수행을 할 것인가?


승단의 정책 역시 출가자, 그것도 가톨릭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비구 중심이다. 자연스럽게 재가 불자는 물론 비구니까지 소외된다. 애당초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출발한 승가 사회가 왜곡되어 있다. 대학의 교수 사회도 승려들의 패권주의가 두드러진다. 재가자 교수는 승려 밑에 줄서기에 급급하다. 교수 사회를 출가자 중심으로 하자는 논의마저 있는 실정이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불교학도 학문인 이상 누구나 공부할 수 있고, 공부했다면 누구나 공부한 내용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출가자도 거리낌없이 재가자에게, 더 나아가 타종교인에게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 학문으로 승부하는 세상에서는 학문을 잘 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래도 그리스도교(가톨릭, 개신교)에 비하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기는 하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불교에서 이해하지 못할 것 중의 하나가 '스님'이라는 호칭 문제이다. 스님이란 본래 '스승님'에서 나온 말이다. 아주 높임말이고, 따라서 남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승려들이 남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소개할 때도 스스로를 '○○스님'이라 부른다. 세상에 자기 이름에 '님'자를 붙이고, 자기가 자기를 높이는 경우가 있는가? 더욱이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야 할 종교의 세계에서. 자기를 죽이는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세상에서 말이다. 설령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경우에 닿지 않는 말이라면 빨리 고쳐야 한다. 그저 자신의 이름(法名)만을 부르면 될 일이다.

6. 무국적주의와 시대불감증


이러한 일들 외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종교들의 국적이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천주교인은 자신의 국적이 로마인 것으로 착각하고, 학문도 서양 중세의 것을 복사하는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내 뒤에 로마가 있고, 수억의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내심 우쭐해 한다. 21세기가 코앞에 닥쳤고, 모던, 포스트모던 논의마저 지리해진 마당에 불교학이라는 학문은 19세기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세계 불교학계를 주도하다시피 하는 미국 등의 학문적 흐름에 당췌 눈이 어두워 보인다.

 

불교학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답답한 것은 왜 불자 중에는 그리스도교를 전공으로 하는 이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있다면 호교론적 차원이거나 호기심 충족의 차원일 뿐, 제대로 된 의미의 학문적 수준을 갖춘 그리스도교 연구자는 거의 없다. 도리어 전문적인 불교학의 깊이를 이해하고 전개하는 그리스도교인 불교 전공자가 눈에 띤다. 우리나라 불교를 구미에 전하는 이는 도리어 그리스도교인 불교 전공자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 이른바 일본 교토학파(京都學派)에 속한 불교철학자들은 이미 일급 신학자 수준의 그리스도교학을 전개한다. 불교 언어를 19세기에 가두어두지 않고 21세기의 서양 학문사회에도 어울릴 전문적이면서 대중적인 언어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창조적인 불교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대오각성은 내적이고 심리적으로 "일체중생실유불성"만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산은 산, 물은 물"이란 일체 사물의 전적인 긍정이다. 진정한 타자 긍정, 참된 "실유불성"이려면, 타종교 안에서도 불성의 움직임(性起)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학에서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도 사실상 부처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사람들 만큼의 학문적 깊이를 이루고, 그 신앙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불자가 그럴 수는 없다 해도, 진지하게 연구하는 불자를 통해 상대 종교의 세계가 충실히 소개될 수 있는 기회는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상대의 세계가 보이지 않고, 상대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한, 상대를 존중한다면서도 언제까지나 자기의 언어만을 되뇌이게 될 뿐이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젊은이를 필두로 신자들은 급격히 교회를 떠나가는데 무사태평하다. 도대체 100년은 커녕 10년 후의 일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며 시대 탓만 한다. 신자들이 감소하고 있는 이유를 자신의 잘못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변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종교든 신학이든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의 생김새가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는데, 어찌 종교가 변하지 않겠으며, 그런 것들을 수단으로 하는 학문이 어찌 변할 수 없다는 말인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해도 변하고, 변한다고 생각해도 변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결정적이다. 불변을 고집한 결과의 변화는 언제나 시대를 주도하지 못하고, 그 뒤꼬리만을 잡는 소극적인 행동에 머문다. 변화야말로 시대와 학문의 속성일 수 밖에 없음을 진작에 깨친 사람은 그 변화 자체를 학문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언제나 변화하는 현실을 신학이라는 학문 안으로 가져와 정면 승부하고, 현실 자체를 신학화하는 적극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런 이들의 학문이 언제나 시대를 선도(先導)하는 것이다.


7. 아늑한 듯 답답한 민족종교


그래도 천도교나 원불교와 같은 우리의 민족 종교는 다소나마 위안이 된다. 서구 사상과 문명이 이천년을 돌고 돌아온 자리를 이미 백년 전에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하고 보잘 것 없는 반도 땅에서 예견하고 보여주었다는 사실에 자긍심도 느껴진다. 서구 종교, 그리고 기존의 출가자 중심의 종교와는 달리, 여기서는 종파가 없고, 다른 종단에 비해 신분이나 성별간의 차별도 적다. 물론 여전히 교령(천도교)이나 종법사(원불교) 혹은 상위 지도자는 주로 남자에게 제한되어 있지만, 그래도 기성 종교에 비하면 한결 평등한 편이다. 이미 교리에서부터 남녀동권(男女同權)을 선포하고 있다. 물론 이들 종단에도 문제점은 있다.

 

특히 천도교는 무엇보다 과거의 영화만 되뇌이고 당췌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현실을 추스리기에 급급해 보인다. 출가자나 사제 계층에 해당하는 사람이 없어 신분상의 차별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러한 장점을 살리기 보다는 도리어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정체해 있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포덕(布德)할 사람이 없으니, 점점 더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제도 탓을 한다. 하지만 제도가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본의 신흥 불교인 릿쇼코세이카이(立正 成會)도 기본적으로 출가자가 없는 재가불교 단체이지만, 건실히 성장하고 있다. 교단의 지도급 인사조차도 교회 밖의 자기 직업을 가지고서 종교생활을 한다. 그러나 자체 발표로는 이 교단 소속 신자가 600만에 이룰 만큼 큰 종단을 이루고 있다. 전임 포덕자가 없어서 종교 발전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천도교인이 있다면, 이 종교에서 한 번 배워봄직 하다. 유능한 젊은 이를 일본에 보내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출가자가 없이도, 사제 계층이 없이도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서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급격히 노쇄해 가고 있는 현 흐름대로라면 미래는 암담하다. 젊은 사고, 미래적 사고로의 전환이 가장 강력히 요청되는 곳이 천도교인 듯 하다. 그저 과거의 영화만을 회상하는 수준을 하루 빨리 넘어, 급변하는 세계적 조류에 대처해야 한다. 젊은 생각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다.


원불교는 천도교에 비하면 한결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모든 종교들을 한집안 식구로 보는 교조의 앞선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느라 종교간 대화, 종교간 일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독창적으로 종교연합(United Religions)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이를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총부 차원에서 후원금도 낸다. 이러한 모습은 보기에도 멋있다. 가장 가능성있는 우리 민족의 종교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연합 운동이 대종사의 가르침, '교리적인' 실천을 위한 것이라면, 똑같이 교리가 배타적으로 되어 있어서 참여하지 않는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이웃을 배타하는 태도에 비하면야 백배, 천배 훌륭한 자세이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교리적인 실천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차피 '교리'라는 평면적 틀에 갇히기는 매한가지라는 말이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확인하려는 차원에서 하지 말고, 도리어 그 가르침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 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지만, 자기의 이익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고서 하면 안된다. 도리어 자기가 깨질 각오를 하고서 배워야 한다. 그 때에만 자기가 참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일체의 교리를 깨치려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가 깨져야 한다. 종교간 대화가 하나의 교리라면, 그 교리부터 깨져야 한다. 개신교의 경우는 교리상 답답하고 배타적인 데가 많다. 도대체 몇백 년 후에까지 우리 사회 안에 살아있을지, 우리 사회 안에 종교적인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자취를 남겨놓을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힘들다. 그만큼 아직 우리 사회와 문화 안에 제대로 뿌리 내리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신교의 편협함을 깨치려는 노력들도 제법 있다.

 

교리상 답답하고 배타적인 데가 많은 개신교가 어떻든지 생명력을 유지해 가는 것은 이런 사람들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의 세계는 기존의 틀을 깨치려는 사람을 통해 이어진다. 그곳에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대종사의 가르침이 부정될 각오를 하고 실천할 때 대종사의 말씀은 제대로 보이고 원불교는 진정한 원불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원불교는 지금 제도적 종교로 나아가는 전환기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의 제도화가 피치 못할 것이라면, 제도화에서 오는 폐해는 최소화해야 한다. 대다수 기성 종교들의 문제점은 제도화하면서 비롯된 것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적 가르침의 핵심 역시 자기중심주의를 깨뜨리고 다른 이들을 자기 이상으로 돌아보는 곳에서 성립된다. 불교는 어떤 굳어진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살아움직임에 있는 것이다. 자기(我)를 깨고 일체의 무집착을 실천하고자 하는 불교는 그 가르침에서부터 대화적 태도, 다원적 태도의 한 복판에 있다. 무아, 무집착의 실천으로 부처님이 부처님되신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의 폭이 너무 넓고 깊어서인지 불자들은 도리어 그 안에 갇혀버리는 것 같다.

 

넓고 깊은 이치가 도리어 '도그마'가 되어, 도대체 자신을 깨뜨리려 하지 않는다면 지나친 오해이고 속단일까? 지옥에 있는 마지막 중생까지 구제하지 않고서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법장 보살의 서원을 되새겨야 할 때이다. 이것은 남을 차별하는 자기중심주의가 남아있는 한 불가능하다. 넓고 깊은 부처님의 세계는 우리가 서있는 자리 바깥에, 저 먼 곳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마저도 깨뜨릴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넓고 깊은 가르침인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을 긍정하고 일체의 차별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어울릴 뿐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살려나가야 할 불교적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배타적으로 외도(外道)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그 외도의 길로 들어서고 마는 것이다.


삼라만상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 말하면서도, 생겨난 것은 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좋은" 것이라 하면서도, 도리어 그 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 중심적 조건들은 타파되어야 한다. 초월적이고 무한한 하느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행위는 참으로 비그리스도교적이고 오만한 행위이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하느님을 제 손 안에 가두어두는 꼴이다.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실천한다며, 스스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꼴이다.

 

 진리를 독점하는 태도는 진리를 유한한 곳에 가두어두는 것이고, 유한한 곳에 가두어두기에 우상숭배적 행위인 것이다. 참으로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으려면" 하느님이 모든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놓아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는 예수의 말처럼, 곳곳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보고, 곳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아야 한다. 불교나 유교의 정신이야말로, 원불교나 천도교의 그 깊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적절한 장소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8. 나오는 말

물론 모든 사람이 현실적으로 이와 같이 실천하기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종교적인 원리, 근거 자체는 워낙 심오하여 어떤 유한한 표현에 제한되지 않는 초월적인 것이지만, 인간이 이 깊은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유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자가 자신의 종교 체험을 불교적 원리에 따라 재단하고, 그리스도교인이 그리스도교적 원리에 따라 해석하는 행위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종교 안에서 최상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종교는 결국 하나라고 그 누군가 증언한다 해도, 그 '하나됨'에 대한 이해가 종교 전통별로, 더 나아가 개인별로도 제각각인 까닭에, 그러한 증언이 실제로 옳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기의 세계관을 기초로 듣고 이해할 수 밖에 없도록 틀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마당에 종파주의, 자기중심주의는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하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종교들의 세계는 깊고 넓지만, 유한한 인간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인 한, 언제나 더 낳은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유사 이래 인간이 언제나 인간에게 문제덩어리였듯이, 종교 역시 종교인에게 문제덩어리일 수 밖에 없다. 21세기의 종교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의 심부에까지 들어간 이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종파주의, 자기중심주의를 부수면서도, 그렇게 부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자신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인정받게 되는 깊은 가르침과 그 실천이 요청된다. 미래 한국 사회의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통합도 이 만큼 깊고 넓은 종교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는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종교적 깊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주변의 치부도 드러내보았다.




기사입력: 2012/10/03 [16:39]  최종편집: ⓒ 메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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