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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뽀]'관광기생'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관광매춘' 첨병이었다
 
박선협大기자

나는 기생관광의 첨병이었다.

박정희시대가 국책사업으로 기생관광을 빌미삼아 외화벌이에 눈독을 들이던 무렵이다.

1973년에서 83년에 이르는 10여년을 그렇게 살았다.

삼청각-대원각-청운각-오진암-풍림각 그리고 기억할 수 없는 수수곳곳에서 이른바 '기생'이란 이름의 아릿다운 처녀들을 외화벌이에 매진시킨 일선요원이었다.

 

롱타임 60불 숏타임 30불이 공공연했다. 한창 밤12시 통금이 행해지던 무렵, 그에 아랑곳없이 밤거리를 활보했다. 풍전호텔-프리지덴트-로얄-코리아나-반도는 기생관광 숙소의 천국이었다. 어물쩍 밤이 지나면 돈 보따리를 싸들고 달려들던 포주들이 넘쳐났다. 즐거운 비명이 질펀했다. 74년 초부터 85년까지 일본(도꾜-오사까-후꾸오까-삿뽀로-센다이-나고야-가고시마)주재원으로 "한국처녀들의 헌팅사업이 국책이라며 이코노미 에니멀을 자칭하던 일본인들을 호객하는데 혈안이었다.

 

여권을 쥐곤 500불 한정으로 3 개월씩 일본을 휘돌다 귀국하는 강행군이었다.

 

김포공항(먼지가 날릴 정도의 보잘 것없는 건물이었다) 을 통해 하루에도 2천명 이상이 미어지듯 몰려들었다. 2박3일이 보통이었는데 그 비용 속에는 으례 관광기생 파티값이 매겨져 있었다. '왜식'에서 '일본식-화정식'레스트랑으로 바뀌던 무렵만 해도 일본인들은 한국에 오는 걸 주저했다. 입국해도 고개를 버젓이 들고 다닐 뱃장이 없었다. 어느 구석에서 돌팔매질을 당할까 몰라 주저했다. 65년 한일협정 이전만 해도 그것이 관행이었다. 풀어재친 것이 박정희였다. '경제재건 관광보국'이 캐치플레이즈로 내 걸렸다.

 

그것이 인연이 되, 대원각 여주인 이 모(나는 그 여인을 갓 마더 God mother 라 불렀다)씨와 내 일터 서울관광 진 모사장사이의 로맨스를 중재하는 모험도 즐겼다. 꼬투리를 알아 챈 진사장의 부인이 질투,시샘을 참아 낸 끝에 조정을 끌어내 눈감아주는 대신 서소문 12층 빌딩을 이 씨에게서 빼앗다싶이 양도받았다는 소문이 저잣거리를 휘돌았다. 끝내 이 씨는 남편과 이혼하고 그렇게 좋아하던 진 사장(그는 부인의 권유로 불임정관 수술로 꿰맨 실밥을 몰래 풀어 낸 재 수술로)과의 사이에서 생긴 딸을 대리고 다른 남자 한남관광의 이 모씨와 짝자꿈으로 미국으로 줄행랑을 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당초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팔자가 억세다싶어 어리숙한 시골남성을 혼처로 정해 딸 하나를 낳고 살던 터였다. 목소리 고왔고 우물보조개가 예뻐 뭇 남성들 선망의 표적이었다.

 

진 사장은 벌어 놓은 자산을 지키다 못해 부도내고 미국가서 목사수업을 받고 귀국을 준비하던 중 병사하여 유명을 달리한 시체귀국으로 종막을 보았다. 나는 그를 뉴욕에서 만나, 한 때 한국관광의 현장을 주름잡던 기생관광을 떠 올리며 씁쓸한 담소에 빠진 적이 있다. 한창 혈기방장하던 무렵이라 어여쁜 아가씨를 불러 내 설악산-불국사를 휘돌아 불사르던 욕정시절이 주마등을 이룬다.

 

'관광'을 사업으로 그 속에 '기생'이란 색갈로 덧칠한 속내를 겪지 않은 세대는 알턱이 없다. 그때만 해도 일본군의 '위안부'가 있었는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모든 전쟁의 유물로 그런 행색이 넘쳐났다는 사실을 고금역사에서 훑어보긴 했다. 크세노폰 얘기도 그 한 대목이다.  '소크라테스도 기생에게 배웠다"는 얘기가 그 대목에 있다.

 

 
 

크세노폰은 생사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기원전 430년께 아테네에서 출생, 전 356년 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으며, 역사, 철학, 정치, 경제, 수렵등 수많은 저작을 남기고 있다.  

아테네에 적대하는 스파르타에 가세했다하여 크세노폰은 전 399년 아테네 시민권을 박탈당한 후 복권되기까지 스파르타의 비호아래 생활했다. 그의 언동은 당시 그리스 세계의 움직임을 잘 반영하고 있다.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 배경을 디오게네스 라엘데스는 '철학자 열전'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아테네의 거리 한 모퉁이에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와 정면으로 맏닥뜨렸다. 그 때 소크라테스는 들고있던 지팡이로 길을 가리키며 질문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어디서 제각기 먹을 것을 준비한다지?' 

'여기~저기~' 라고 크세노폰이 대답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또 이렇게 물어왔다. '어디에서 사람은 우수하고 착한 자가 된다지?' 크세노폰이 선뜻 대답이 없자, '그렇다면 나를 따라와 배우게나'하며 앞장서 걸었다. 

그날 이후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를 선생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아무려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와 친밀한 사제관계였다는 것은 <아나바시스>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크세노폰은 선생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던 듯, 소크라테스가 사형된 것을 알자 그 부당성을 <소크라테스의 추억>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세상에 호소했다.

소크라테스와 크세노폰의 큰 차이의 하나는 <여행>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외국에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것을 일절 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거리에서 밖으로 나간 것은 단지 세 번뿐, 그것도 전쟁으로 출병한 때뿐이었다. '남의 눈을 피하여 고린도에 여자를 사러갔다'는 후세의 소문이 일부 남아 있으나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대철학자 칸트도 일생 프로이센에서 외출한 적이 없다니까 참된 철학은 자기 내부에 있다고 말해서 좋지 않은지. 그점에선 우리의 원효도 손색이 없지만. 이에 대하여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에의 소아시아 행을 비롯,  스파르타, 애리스에 거주를 옮겼다. 본래 소크라테스의 머릿제자 플라톤도 이집트, 남 이탈리아, 시실리아에 나갔고, 작은 소크라테스 학파의 아리스토포스나 안티스치네스도 오히려 외국에서 활동했다. 

알려진대로, 사형선고에서 짐행까지의 감옥살이 기간 중에 소크라테스는 도망치려 맘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다. 외국에서 생활할 있도록 손을 마련해 놓고 그걸 권유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이 땅의 생활을 골라 교육받은 은혜가 깊다'는 신념으로 여유있고 침착하게 독배를 들었다. 

애국적이라기 보다는 자유, 자치, 자급자족을 원칙으로한 폴리스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이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가 내린 판결에 따르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폴리스 사회는 바뀌고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도래라는 세계시민을 모토로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스인 용병 1만 명을 부추켜 형인 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려한 소 키루스는, 이미 그리스를 공격 세계사에 남을 대전쟁을 전개했던 크셀크세스 1세의 증손으로 이후의 페르시아 왕실 안에서 보기 드물게 통치자에 걸맞는도량과 기개에 넘친 인물이었다.

크세노폰은 이 소 키루스의 찬미자였기 때문에 그의 인물상을 파악하는 데는 ,<아나바시스>에서의 평가를 약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오랜기간 몰락 기미 끝에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숨소리를 거둘 운명에 처할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 속에서 장렬한 개성이 빛나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소 키루스는 어린시절부터 경양의 미덕을 갗추고 이미 통치술이나 복종술을 배웠다한다. 승마나 수렵을 즐겼고 혈기방장한 청년기에는 혼자서 곰과 대격투를 벌인 적도 있었다. 우의를 존중하고 약속을 지키며 질투나 부정을 멀리하고 통치자로서의 덕을 쌓아 부하로부터 신뢰가 두터웠다.

헌상받은 포도주가 맛이 좋으면 친구를 볼러 마시고, 오리고기나 빵도 맛을 보아 흔쾌하게 생각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먹어보게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소 키루스의 야심이 실현되었다면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본인이 죽지 않았더라면 1 만 명의 퇴각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요절을 애석하게 한 인물이다.

 

기생은 최고의 지식인 

 

퇴각의 기술 중에는 기생이 군데군데 얼굴을 내민다. 특정의 남자가 데려간 것일까, 군대 전체의 위안을 위해서 고용된 것일까, 형태는 확실치 않으나 뒤에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도 이름난 기생 '타이스'등이 따라 간 예를 보아, 오랜 세월에 이른 원정에는 '동반여성'이 불가결의 존재였는지 모른다. 

당시의 그리스에서는 '정실 아내는 자손을 위해, 첩은 신변의 편리를 위해, 창녀는 쾌락을 위해'라는 것이 여성을 보는 일반적인 눈이었다.  집 깊숙이서 가사나 육아에 전념하고 외출하여 사람들 눈에 띈다든가 입방아에 오른다든가 하지 않는 것이 여성의 부덕이었다. 교양미는 오히려 방해에 다름아니었다. 

그에 비해 기생은 여러부류의 남자들을 상대로하여 화제를 빗나가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대답할 수 있도록 세상 사에 대한 지식이나 기지가 요구됐다. 그리고 상대로부터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기묘하게 생각될른지는 모르지만 심중팔구 어떤 신분, 어떤 경우에 있는 그리스 여성 중에서라도 기생이 가장 교양이 있었고, 남자들과 교분을 나눌 입장에 있었다. 

집안에 속박됐던 우리의 옛 왕조시대의 여성에게도 이것은 통하는 것이있어 '황진이, 계월향'만 하더라도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동서고금이 이와 같았음을 짐작케 한다.  민주정치를 추진한 당시의 최고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후처가 되어 정책 면에서 자문역을 했다고 전하는 여성도 기생이었다.  

'아스파샤' 는 또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수 가르침을 받기도 한 여성으로 반열에 오른 기생이었다. 

그리스 미술을 대표하는 '아프로디테'상?모델이 된 여성도 기생이었으며,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도 그 흐름을 탔다고 전한다. 프라크시티레스의 절품 '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는 기생인 '퓨리네'였다. 오늘날 루브르 미술관의 '밀로의 비너스'와 마찬기지로 이 작품 하나를 생애 한번만이라도 보기위해 세계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 그런 의미에서도 기생은 인류사의 여행문화에 끼친 공이 있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른지 모르겠다. 

 정작 내가 그 한 역을 담당하여 동분서주 밥 그릇을 챙겼다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사치였다. 말이 포주요 삐끼지 그야말로 그것은 관광보국 그 자체였다. 삶이었다.

 

그 때를 인바운드 Inbound로 그렇게 10년을 지난 뒤 1986년 2월 '관광자유화'물결에 들뜬 전선에서 나는 한국인의 해외관광을 이끈 도매상 Whole saler 이었다. 아웃바운드 Out Bound Man이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해 2월23일 나는 그 첫 출항의 앞잡이로 나섰다. 월급의 절반을 잘라 아내를 우격다짐 벗삼아 태우고 17명의 유람자를 이끌어 동남아(방콕-홍콩-말레시아-발리-싱카포르)13박 14일을 돌았다.

 

 

 

이래 143개국의 도시를 돌면서 내가 일본인들을 거든 일과 매우 유사한 현상을 우리 한국인들에게서 발견했다면 웃고 지날까?. 남정내 누구든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넌짓이 묻는 말은 딱 한가지 였다.  "미스터 박, 어느나라 여자가 제일 예뻐요? 이번에 꼭 한 번 태극기를 꽂아야 되겠는데 추천할 나라명소를 안내해 주세요.비용은 얼추 몇 달러면  될까요?"

 

'태극기'를 꽂고 싶어한 사람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등 천차만별로 매우 당연한듯한 바람이었다. 시대와 상황이 다를 뿐, 관광이란 그런 꺼리에의 유혹을 발산하는 현장으로 그것은 그야말로 꽃다발이었다. 그 무렵, 관광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65년 최초로 관광학이 도입된 것을 필두로 우후죽순 대학의 정규과목으로 발돋았다. "도대체 관광을 세상에서 누구 제일먼저 만들어 내고 시작했을까...가 내 강의의 첫 테잎 스타트였다. 나는 그것을 인류기록물의 최고걸작인 성경 첫 대목에서 따 왔다. 하느님이 처음 세상만물을 이렛만에 뚝딱 만들어 세우고는 "보기에 좋았다"고 했으렸다.

 

바로 그 보기에 좋은 것을 행하려(먹고-자고-보고-사며-걷는)드는 것이 관광임을 설파한 것.

경기대,한양대,숭의대,경희대,장안대등 관광학과를 개설한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강단을 뻔줄나게 드나들었다. "아~ 이런, 관광기생을 삐끼삼던 첨병이 대학교수로 순수한 남녀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해?" 그런 생각은 한갖 부질없는 위선이요 자기기만 이었으나 가책의 필요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걸 두고 감각의 마비현상이요 충동조절 장애자라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일에 하등 관여치 않았다. 무관심 그것이었다. 되레 그런 경험을 경륜인양 포장하여 재미를 둔갑시킨 것으로 학생들을 즐기게 했다. 세상이 눈감아 준 것이다.

 

이른바 강단관광이 그렇게 5년은 지났다. 국외여행을 가려면 '소양고육'이란 의무교육이 필수였는데 수수년년 시행되는 과정에 나는 교수요원으로 '세상에서 가장좋은 선물'을 주제로 3년 간을 웃겼다.

증명사진 찍는 관광이 아니라 현장사람들과 교분하는 관광의 재미에 관해서 일희일비를 발겼다.

수강 생 중 이름모를 어여쁜 소녀와의 로맨스가 생긴 것은 그야말로 한강 배 띄우기 였다. 여자女子는 좋은好 선물이어서 함께 누려야 제격이란 처지였다. 북아스카이웨이 정릉등지가 좁다하고 홀라당 벗어부쳐 지날 정도였다.

 

기생관광의 천국이 한국의 역사 속에 까무러친 시절을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언자 함석헌선생은 한국의 역사를 '갈보'롤 보았다. 1,200여회의 피침략국의 민초인 처자들이 당한 모진 팔자를 총괄한 운명적 결과물로 표현한 것. 그는 그래서 '단일민족'이란 슬로간을 배척했다. 지금 외국인들이 150만이상 정착해 다문화된 겨레현상이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되듯 역사상의 실상은 함선생의 귀뜸이 아니더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대목에 다름아니다.

 

바로 그런 기록물에 오른 것이 있다. 유사한 르뽀를 담은 내용들이 횡행이다.

 

매매 보고서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 i였다

성매매 단속하는 척하며 여성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여겼던 한국 정부… 한국전쟁 때 위안소 설치하고, 독재정권은 주한미군·일본인 대상 성매매 조장해

 <한겨레>제887호 등록 : 2011-11-22 10:38 수정 : 2011-12-09 13:45 

대한민국에서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불법이 아니다. 홍등가의 한편에 파출소가 공존하는 기괴한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새삼스럽지 않다. 이런 괴리는 왜 생긴 것일까?

답을 하려면 먼저 국가의 이중적 성매매 정책을 볼 필요가 있다. 박정미 한양대 HK연구교수(사회학)가 올해 쓴 논문 ‘한국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는 성매매에 대한 국가의 의도된 침묵과 통제 과정을 파헤쳤다. 400쪽이 넘는 두툼한 논문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성매매에 한 손으로는 불법화의 낙인을 찍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방임을 하거나 때론 적극적으로 ‘포주’ 노릇까지 떠안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엔군 위한 위안소 운영

성매매를 둘러싼 국가의 이중적 태도는 1946년 미군정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제국주의를 밀어낸 미군정은 앞선 식민통치와의 차별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1946년 5월17일에 선포된 ‘부녀자 매매 또는 기 매매계약의 금지령’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공창제를 유지하던 일제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 조처로 보였다. 신생 국가의 신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1946년 5월28일치 <동아일보>는 “조선이 해방되었으니… 유곽의 여성들이 해방되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경향신문> 기사
정작 미군정의 의도는 달랐다. 러취 군정 장관은 “(금지령이) 공창의 폐지는 아닌 것은 물론 사창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이 자진해서 맺은 계약 아래에서 종사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밝혔다. 즉 개인이 타의에 의해 성매매를 하게 되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다면 공창이든 사창이든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미군은 오히려 일본강점기 때부터 유지돼온 접객여성 대상 등록·검진 관련 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군정의 관심은 한국의 성매매 여성과 접촉한 미군들 사이에서 퍼질 수 있는 성병을 통제하는 데 한정됐다.

공창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쪽은 신생 국가의 입법부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8월 ‘공창제 등 폐지령’을 통과시켰다.

 
1960~80년대 기생관광은 한국의 수치이자돈줄이었다. 1970년대 외국인 관광 접대 여성을 대상으로 등록증(가운데)을 발급해 인권침해 시비가 일기도 했다. 1980년대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시위(위)가 벌어진 한편, 정부는 미국 잡지 기자의 기생관광 업소 취재(아래)에 협조했다. <동아일보> 기사
 
‘성매매 금지주의’를 법으로 천명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렇지만 법의 힘은 미미했다. 1948년 1월 <경향신문>은 “예산은 전무 상태이고, 중앙청에 대하여 국고 보조를 요청했으나 이것이 가망성이 없어 그저 한탄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쟁을 거치며 국가는 스스로 법을 깼다. 정부의 1956년 자료를 보면, 육군본부는 서울과 강릉 등 4곳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자료에서 확인된 ‘위안부’ 수는 79명이었다. 1952년 이 여성들을 찾은 남성은 연인원이 20만4560명이었다. 육군본부는 “(사병들이)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채명신 장군도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고 썼다.

정부는 국군뿐 아니라, 유엔 연합군을 위한 ‘위안소’도 운영했다. <부산일보> 1950년 9월 기사를 보면, 마산시가 “수일 내로 시내에다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는 연합군 ‘위안소’ 5개소를 신·구 마산에 설치하기로 되어 이의 허가증을 이미 발부했다”. 당시 정부 보건부 방역국에서 내놓은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자료에서도 연합군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다. 정부가 성매매를 알선한 ‘포주’ 노릇을 맡았다고 증언하는 문서는 서글프게도, 차고 넘쳤다.

 

 

미군을 대신한 일본인 ‘기생관광’

 

1960년대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혁명공약’에서 성매매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1961년에 제정된 ‘윤락행위 등 방지법’은 새 정권의 의지를 드러냈다. 21개 조로 이뤄진 윤락행위방지법은 국가의 성매매 금지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보건사회부는 전국 104개소에 성매매를 허용하는 ‘특정 지역’을 설치하고, 그 가운데 9개소를 서울에 할당했다고 발표했다. 한 입에서 두 말은 쉽게 나왔다.

국가는 왜 성매매 금지 원칙을 지키지 못했을까? 1961년 교통부 기획조정관실이 내놓은 공문을 보면 답이 있다. 공문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이하게 유치할 수 있는 관광객은 주한 유엔군”이라며 “외국인 상대 접대부”를 대상으로 교양강습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미군 병사들은 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휴가를 떠났다. 1961년 3월13일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에 보다 많은 외화를 떨어뜨리게 한다는 견지에서는 모든 소모품을 국산으로 충당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술도 외국 술이요, 벌거벗은 아가씨도 외국 아가씨, 게다가 외국돈까지 쓰니…”라고 개탄했다. 국가의 선결 과제는 ‘벌거벗은 아가씨’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1962년 4월25일치 <서울신문>은 서울시경이 “4천 명에 달하는 관광접객업소(댄스홀·카바레 등)의 서비스 걸들에 대한 접객업무 교육을 실시”했다며 그 이유가 “외국인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1966년 <신동아>의 기사는 차라리 솔직했다. “양공주들이 갖는 거대한 힘이 있다. 음지에 피어 있는 이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국가정책의 지상 과업이 되다시피 한 외화 획득의 한 역군이 되고 있다.” <신동아>는 당시 전국 190개소의 유엔군 전용 홀에서 나오는 외화가 1년에 1천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1966년 당시 우리나라가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외화는 2억5천만달러였다.

1970~71년 주한미군의 규모가 1만8천 명 줄었다. 정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1971년 8월 내무장관이 각 경찰에 보낸 공문에서 “보건 당국과 협조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떠나는 미군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군의 빈자리는 ‘기생관광’을 하러 온 일본인이 채웠다. 1965년 한-일 수교가 계기였다. 기생관광이 절정에 이르던 1977년 한국을 찾은 일본인의 96.8%는 남성이었다. 경제성장에 몰두한 정부는 관광수입과 관광객 목표치를 제시했다. 일선 여행 알선 업체에도 ‘할당량’이 떨어졌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각종 혜택이 사라지거나, 심한 경우 허가가 취소됐다. 1979년 <신동아>는 “탈선관광이 극히 당연하게 당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다. …기생파티는 거의 모든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베풀어졌다”고 보도했다. 물론 정부도 계속 한몫했다. 1972년 서울시의 자료를 보면, 기지촌 접객업소 여성 512명, 관광요정 접객업소 여성 1795명을 대상으로 교육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국가의 선결 과제는 ‘벌거벗은 아가씨’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서울신문> 1962년 4월25일치에는 서울시경이 “4천 명에 달하는 관광접객업소(댄스홀·카바레 등)의 서비스 걸들에 대한 접객 업무 교육을 실시”했다며 그 이유가 “외국인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오늘도 여전한 국가의 원죄

1980년대 국내 경제가 성장하면서 내국인 성매매 ‘고객’의 비중은 늘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고, 1984년 사치성 유흥업소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성매매 업소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은 더욱 비옥해졌다. 미국 스포츠 주간지 <더 스포팅 뉴스>는 1985년 10월 서울 올림픽 특별호에서 한국 음식을 소개하며 한 호텔 식당에서 벌어진 ‘기생파티’ 사진을 실었다. 당시 취재 과정에서 정부가 편의를 제공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기생관광을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정책’은 당시까지도 유지됐던 셈이다.

사실상 구호에 그쳤던 정부의 성매매 금지 정책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조금씩 효력을 발휘했다. 1996년 ‘윤락방지법’과 2004년 ‘성매매금지법’은 주요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성매매라는 탈법은 ‘관행’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2010년대 대한민국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국가가 스스로 저질러온 ‘원죄’가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다까끼 마사오의 추악함- 70년대 기생 관광

 

 

 

2016.05.15.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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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244212

 

1. 1972년 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음에 따라 일본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

일본 사람들이 섹스 관광을 하러 대만으로 주로 갔는데, 대만에 가기가 어렵게 되니 이참에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 대만대신 돈 벌겠다고 나섬

 

2.1972년 8월 교통부는 기생 파티를 하는 요정을 지정

 

3.여성 단체에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벌이자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탄압.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이 유신 과업 수행을 가로막는 반정부 행위라고 하면서, 반대 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

 

4.박정희 정권은 관광 기생이라고 불린 접객 여성들한테 허가증을 내주고, 1973년에는 법령을 개정해 등록제를 법제화

 

5.그래서 그러한 여성들이 호텔을 무시로 드나들 수 있게끔 지원

6.(당시 일반서민들은 통행금지때문에 밤에는 못돌아다녔는데)

이런 여성들에겐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게 국가적지원

7. 대한민국 문교부 장관이 1973년 매매춘이 ( 외화만 벌어들인다면 )애국이라는 취지로 발언

"한국 여성은 경제 건설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기 위해서 몸을 바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기생 호스티스가 대거 일본에 진출해서 몸을 바치며 밤낮으로 분투하는 애국 충정은 훌륭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1978년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 예산이 35,170억원 이던 시절 일본인 기생관광으로 밝혀진것만

700억원 (당시 예산의 2% 라는 막대한 금액을 ) 획득

 

요즘 대한민국정부예산이 350조원의 2%라고하면 지금의 7조원과 비슷한엄청난규모

 

()2)

70년대 기생관광이 있긴 했었군요.

 

“70년대 성북동 대연각이라 우이동 삼청 이후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잦아들자 요정은 외국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려 ‘기생관광’의 중심지로 등장했다.

 

그가 실언을 하고 급히 주워 담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매춘은 70년대 기생관광 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

 

삼대를 즉살하라. 한나라 허태열 '섹스 프리 특구' 제안 논란 민주 조배숙 "60·70년대 기생관광 부활하자는 것이냐" 맹비난 김회경기자 ******@**.**.** 한나라당 허태열

 

70년대 이후 생겨난 이른바 <70년대 기생관광파티> 등의 현상은 관광문화가 다소 그릇되게 전개된 것으로, 전통사회에 존재하면 광복 후 이것이 폐지되어 제도적인 기생은 사라졌다.

 

6~70년대 기생관광으로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명성(?)을 얻어 수백명의 예쁜 언니들로 할렐루야 기도원은 다름아닌 옛날 이름을 떨치던 요정, 바로 선운각이더군요.

 

‘육만엔이란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시인 곽재구는 1960~70년대 기생관광에 만연했던 일본인의 한국 기생관광 모습과 감상을 시 ‘유곡나루’에서 이렇게 그렸다.

 

또한 60~70년대 일본인을 상대로한 70년대 기생관광을 떠올리게 하며 국민들에게 모욕감을 준 허씨는 이번 발언에 국회의원 성교육 시간을 가지는 것을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70년대 기생관광 이후 생겨난 이른바 <기생파티> 등의 현상은 관광문화가 다소 그릇되게 전개된 것으로, 전통사회에 존재하면서 뛰어난 문학과 예술을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광복 후 이것이 폐지되어 제도적인 기생은 사라졌다.

 

조배숙 민주당 의원은 “과거 60~70년대 일본관광객을 겨냥했던 ‘70년대 기생관광’을 기억하는가. 이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치욕의 대한민국 쏟아지는 등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여성문제 등의 취재를 통해 경제성장 위주인 일본사회를 냉철히 비판하였으며, 70년대의 ‘70년대 기생관광’과 공해수출 문제 취재를 계기로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70년대 일본인 상대의 기생관광을 부활시키면,한국은 비약적인 제2의 한강 기적을 이룩할것이 성매매가 합법화 된다면 가장 적합한 사회적 여건을 가진 국가는 한국이다.

 

이 공연은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 후 70년대 기생관광 전반을 통해 크게 일어난 마당극운 국악반주에 맞춰 김민기가 불렀으며, 2부는 한일관계의 문제를 특히 기생관광에 초점을 맞추어 풍자한 <소리굿 아구>가 공연되었다.

 

사회적으로 1970년대 중반 일본 관광객들이 우리 나라에 몰려오면서「70년대 기생관광, 기생파티, 현지처」등의 말들이 사회적 문제로 외채합작회사」라는 말이 태어났다.

 

세계 도박꾼들 유치해서 달라좀 더 벌자고 ?? 조냉 어이없는 세퀼세 70년대 기생관광 일본인 기생관광으로 국가적 치욕을 쉬쉬하는 마당에.. 아예 대놓고 "윤락 국가"로 전락

 

일본애덜은 세계 2차 대전에 정부주 또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들 팔아먹고, 베트남전에 달러벌러 참전하고, 저 70년대 기생관광도 했었더군요. 이건 아예 일본인 대상이었더군요. 그래서 70년대 시절에 기생관광 운동 반대도 했었네요.

 

이후 룸살 요정정치'의 산실로 불리기도 했으며 70년대 기생관광 후반에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요정관광', 혹은 '기생관광' 장소로 전락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원폭피해자 지원활동과 ‘기생관광'(성매매관광)을 반대하는 국제운동에 앞장섰 등에 관심을 기울이며 70년대 기생관광 박정희 유신정권 때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인신매매 외화 벌이의 주역으로 '애국자'소리를 듣는 웃지 못할 현실도 있었으며, 70년대엔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이 민족적 공분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체제가 바뀌어도 밑바닥 인생들은 그대로다." "일본을 떠나 국제적 감독이 되고 싶다." 등의 체념적 발언을 하더니, 갈기를 휘날리며 도쿄 거리를 누비던 거친 모습은 사라지고 깔끔한 그가 70년대 기생관광가 되자 변했다.

 

-출처 조정래 소설 '한강'- 그때 일본 경제발전 쩔때여서 물가싼 우리나라로 많이 여행왔었지. 기생관광이라고도 했는데 그때 매춘하면서 외화버는거니까 자기들도 애국자라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웃긴 사실은 한국인이 열도에 방문하면 일본 기업체에서 기생관광을 시켜줌 일본 열도가 원조란 건 아시지? 한국도 70년대 기생관광부터 열도인에게 기생관광을 해서 유명해짐 현재 그래서 기생관광 반대를 외치는 시위도 많다.

 

이에 대해 민주당 조배숙 의원은 4일 성명을 내고 "과거 60~70년대 일본 관광객을 겨냥했던 '70년대 기생관광'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치욕의 대한민국으로 기록되고 전해졌다.

 

정부차원에서 대만대신 돈 벌겠다고 나섬 2.1972년 8월 교통부는 기생 파티를 하는 요정을 지정 3.여성 단체에서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을 벌이자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탄압. 기생 관광 반대 운동이 유신 과업 수행을 가

 

[편집실에서]10억엔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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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곽재구는 1960~70년대에 만연했던 일본인의 한국 기생관광 모습과 감상을 시 ‘유곡나루’에서 이렇게 그렸다. ‘육만엔이란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버스 타고/ 부산 거쳐 순천 지나 섬진강 물 맑은 유곡나루/ 아이스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사일 풀코스에 육만엔이란다./…/ 육만엔이란다, 낚시대 접고 고무장화 벗고/ 순천 특급호텔 사우나에서 몸 풀고 나면/ 긴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서비스 볼 만한데/ 나이 예순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아이스박스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맑은 물 값이 육만엔이란다.’

3박4일 풀코스 6만엔. 어디 섬진강과 순천 일대에서만 그랬을까. 외화벌이 목적으로 일본인 관광을 장려한 게 정부였으니, 3박4일 풀코스 6만엔은 당시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가수 정태춘은 곽재구의 이 시를 살짝 개사해 ‘나 살던 고향’이라는 제목을 붙여 애절하게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매춘관광으로 짓밟힌 당시 한국의 현실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런 류의 기생관광은 이제 사라졌을까.

그런데, 10억엔이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대가로 일본이 한국 정부에 지원할 금액이 그렇단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할머니 238명(생존자는 46명)이 그 고초를 겪은 대가가 100억원이 채 안 된다. 물론 위안부 문제는 일본인 기생관광과 같이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3박4일 풀코스 6만엔짜리 기생관광 상품이 떠오르는 건 우리의 처지가 당시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글픔, 안타까움, 분노, 치욕…. 피해자들의 지울 수 없는 아픔과 상처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 법적 배상금이 아닌 돈으로 보상하려는 일본 정부나 이를 받아들인 한국 정부. 위안부 할머니들이 치욕스러워 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를 치욕스럽고 분노하게 하는 것들은 또 있다. 이 10억엔도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전제로 지원을 하겠다는 일본 언론들의 보도다. 두 나라 정부는 이 같은 보도에 펄쩍 뛰며 부인하고 있지만 ‘혹시 이면 합의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위안부 할머니를 우롱하는 이 같은 정부의 태도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과정에서 필진을 감추려고 깜깜이 전략으로 일관해온 것과 너무나 닮아서다. 또 하나는 앞으로 정부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합의는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합의에 포함된 ‘최종적 및 불가역적’이라는 문구 때문이다. 시쳇말로 ‘낙장불입’이라는 건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런 합의를 했는가’ 하는 지탄과 조롱의 목소리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10억엔이란다./ 나 살던 고향에서 군함 타고/ 만주 거쳐 태평양 거쳐 이역만리/ 더럽고 허름한 군 위안부 건물/…/ 갖은 고초와 치욕, 목숨의 대가가 10억엔이란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과 고통을 10억엔과 맞바꾼 굴욕을 시인과 가수는 또 어떻게 노래할까.

 

Old and New _ 70년대 기생관광 뉴스 vs 섹스&카지노 프리 관광특구

1979년 10월 25일,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서거하기 하루 전인 그 날.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 객실에서 40대 일본인이 한국인 호스티스 L양(23)을 살해하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자살기도 전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유서를 써 객실 창문 옆에 남겨놓았다. 빗나간 사랑과 살인을 변명하는, 치기어린 넋두리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결혼한다. 천국엔 국경이 없다… L은 나와 반지까지 교환하며 결혼을 약속해놓고 내가 준 결혼비용을 다른 남자와 다 써버렸다. 기생의 말을 믿은 내가 바보다… 경성특별시 직원님, 수고스럽지만 우리 두 사람 시체를 무연고자 묘지에 함께 묻어주십시오…"

일본에서 선박소개업을 하는 기요타(44)는 4개월 전 단체관광을 와 요정에서 L양을 만났다. 닷새를 L양과 함께 보낸 기요타는 그 후 매달 입국해 그녀를 찾았고 9월에는 이혼증명까지 떼어와 보여주며 결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L양은 성격이 포악한 그와 맺어질 마음이 없었다. 결혼비용으로 1백만 엔을 받았지만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그예 변을 당한 것이다. 기생관광으로 맺어진 욕정과 돈의 변주곡이 빚은 치정살인이었다.

* 출처. 1970년대 기생관광 '부끄러운 한국의 밤' 기사 중에서

 

 

70년대 초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은 한국의 밤을 마비시켰다. 그즈음 서울의 관광지는 어디나 일본인으로 득실거렸다. 일본의 일용잡급이나 막 노동자 수입으로도 한국에 오면 한껏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엔화 가치가 그만큼 높았다. 제 나라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는 푼돈을 나부끼며 허세를 부렸다. 체면도 염치도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차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일본 돈 위세로 최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한국을 찾은 거니까.

 

 * 한나라당 의원 “섹스프리 관광특구” 제안 논란 *

한나라당 소속 허태열 의원

                           '국회 경제정책포럼' 발언 일파만파…

                               “발언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

 

 

 

 

한나라당 허태열 의원이 지난 3일 한나라당 정희수 의원이 주최한 국회 경제정책 포럼에서 “관광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섹스 프리’하고 ‘카지노 프리’한 금기 없는 국제관광특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허태열 의원은 이날 강사로 나온 최중경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의료까지 곁들여 그 안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획기적인 관광지 조성이 꼭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허태열 의원은 “일본과 중국의 인구만 15억명”이라며 “인근 국가의 고소득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특수 관광 지역을 선정해 획기적인 관광지를 조성해야 한다”고 자신의 논리를 설명했다. 

최중경 청와대 경제수석은 즉답을 피한 채 “의료가 가진 경제적 측면과 사회복지적 측면 그리고 형평성 있는 지원 등을 고려해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허태열 의원 발언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비판이 쏟아지는 등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조배숙 민주당 의원은 “과거 60~70년대 일본관광객을 겨냥했던 ‘기생관광’을 기억하는가. 이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치욕의 대한민국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배숙 의원은 “국민 정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돈만 되면 다하겠다는 것인가”라며 “허태열 의원의 발언은 기생관광을 부활시키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치하자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허태열 의원은 자신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자 진화에 나섰다. 발언의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는 설명이다. 

허태열 의원은 해명자료를 통해 “일부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과거의 ‘기생관광’같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천혜의 자연환경과 전통미풍양속과 국민정서를 해치치 않는 범위 내에서 외국의 유명 관광지인 마카오, 라스베가스 등과 같이 각종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관광특구를 지정하여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우리나라만의 관광 상품을 특화․발전시켜 나가자는 취지해서 행한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허태열 의원은 “당시 본인의 발언에 대해 왜곡 보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현장에서 바로 본인의 발언 취지를 정확하게 부연․해명한 바 있으며,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모든 의원들과 행사관계자, 그리고 기자분들께서도 이해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특정 기자만이 이를 왜곡해서 보도한 것은 악의적인 처사”라고 주장했다. 

허태열 의원실 관계자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용어선택이 부적절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규제 프리였다”면서 “말의 취지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다. 한편, 허태열 의원은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지낸 중진 의원으로 부산 북구·강서을이 지역구인 3선 의원이다.

류정민 기자 / 미디어 오늘

 

하바드 총장 연설"70년대 서울 소녀는 창녀였다."| 우리 이야기

지노|조회 11|추천 0|2004.07.09. 22:20
// 이 기사는 도깨비뉴스닷컴 제공입니다.]

Lawrence H. Summers 하버드대 총장은 지난 7월 1일, 한 공식석상에서의 연설중에 "1970년(70년대) 서울엔 미성년 창녀들(child prostitutes)이 100만에 달했다. 오늘날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굉장한 기회 때문"이라는 말을 남겼다. Summers 총장의 이같은 발언은 한국 또는 서울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제가 언급된 것은, 그가 한창 세계화로 인해 달라진 인간생활에 대해 역설하고 있던 중 이었다. 비록 Summers총장이 "경제 성장이 가져다 준 굉장한 기회" (tremendous opportunities that have been created by economic growth) 라는 말로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을 애써서 칭찬하는 듯 하긴 했으나 그의 발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가 된 그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 쓰면 다음과 같다.
In Seoul, Korea in 1970(70s), it is estimated that there were close to(a) million child prostitutes. Today, there are almost none, and the reason is the tremendous opportunities that have been created by economic growth. ()속은 불확실 


1980년 서울 인구는 836만명이므로 70년대 서울인구는 대략 800만으로 보면 된다. 여성을 400만으로 보면 10대 소녀는 100만명을 넘기 어렵다. 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다시 해석하면 70년대 서울에 살았던 소녀는 모두 창녀였다는 뜻이 된다. 미성년자 매춘은 최근의 일이고 70년대 한국에는 미성년자 매춘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도 현실과 전혀 맞지 않다. 요즘 미성년자 매춘은 70년대 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다. 그가 실언을 하고 급히 주워 담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한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시당한 우리 국민으로서의 체면도 체면 이지만, 그 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Summers총장이 미국을 이끌어 나가는 고위 관리의 일원 이었다는 사실이다. Summers 총장은 미국 재무성의 Secretary of the Treasury로 재직 했었고, Deputy Secretary of the Treasury시절엔, 국경을 넘나 들으며 개발 도상국의 경제지원에 깊숙히 관여 하기도 했었다.
그가 경제 학자로서 지니고 있었던 지식은 Secretary of Treasury 로서 접했던 정보와 융화 되어 미국의 대외 정책수행에 적극 반영되었을 것 임은 자명한 일 이다. 

안타깝기 그지 없는 노릇이었지만 Summers총장이 안겨준 실망감은 그의 연설이 끝난후 경험한 창피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Summers의 연설이 끝나고 참석자들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인이 확실한 사람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기 때문에 그 들 중 어느 누군가가 한마디 쯤 할 것으로 기대했다. 우리나라 사람인 듯한 참석자 한명이 재빨리 마이크앞으로 뛰어가는 것이 눈에 띄었고, 속으로는 쾌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준비해온 질문을 읽는데 바쁠 뿐 이었다. 
굳이 그가 아니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모두가 침묵을 지킬 뿐 이었다. Summers의 연설을 잘 못알아 들었기 때문인지 설마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인지, 또는 보신을 위해서 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퇴장하는 Summers총장을 붙잡고 사진촬영까지 요구하는 모습을 대했을 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참석자가 명망높은 하버드대 총장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심었었다면, 그의 목표는 아주 성공적으로 달성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미국 케임브리지 = 도깨비 뉴스 리포터 겨울 나그네 winterreise@dkbnews.com

->분명히 나라의 큰 변화속에서 드럽고 분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저 하바드 총장이라는 사람이 정말 우리나라의 실상을 낱낱히 공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분명히 여성들에게 많은 일이 있었지만 창녀라니. 일부 개셍끼 같은 자식들에 의해 우리의

선배들이 나쁜 일을 당한 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씨발 몇몇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는 

지식층<식충이들> 부터 대기업의 개새끼들까지 드러운 놈들은 무수히 있지만) 하지만 소녀들

대부분이 창녀라니 정말 분통터지는 일이다. 당시 한국 사회의 배경에 대해(지금도 그렇

그렇지만 일본기생관광등) 설명을 한 것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극단적으로 저렇게 말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한 마디 발론 조차 하지 못한 우리 나라사람들도 실망스럽지만, 소위

미국의 최고 대학의 총장이라는 사람의 입에서 저렇게 무책임한 발언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다!! 
P.S: 아 좆나 열받네!

기사입력: 2017/01/17 [06:53]  최종편집: ⓒ 메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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